“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우리 모두 ‘유한한 생명은 죽는다’는 자명한 인과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포들의 자기 재생 능력은 그 사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기력은 점점 쇠하고, 우리의 장기는 수명이 다해 결국 그 기능을 멈출 것이다. 즉, “언젠가는 우리도 모두 흙으로 돌아가리라. 일찌감치 가든지, 좀 더 있다 돌아가든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토마스 만, 『마의 산』) 다만, “우리 모두는 죽음에 가까워진 것이 노인이나 이미 내리막에 있는 사람뿐이라고 착각”할 뿐이다.
“하지만 유년기의 아이도, 청년도, 모든 나이에서 우리는 이미 죽음을 향해 움직인다. 운명은 제 할 일을 한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죽음이 더 쉽게 우리에게 숨어 들어올 수 있도록, 삶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숨긴다. (···) [그래서] 성장 자체는, 잘 생각해 보면, 벌이기도 하다.” 세네카의 말이다.
[천수를 다 누리고 가는 행운을 가리키기도 하는] “자연적인 죽음은 자연을 통해 일어나는 죽음, 즉 시간 · 공간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누구나 알고 있는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 죽음이다.” 이 말에 따르면, 자연사의 조건은 인과관계를 통한 죽음의 예측 가능성, 혹은 이해 가능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사는 사람들에게 [물론 감정적으로는 슬프지만] 머리로는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죽음’으로 여겨진다.
보르헤스의 정신적 스승 격인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는 이러한 ‘자연사’ 흥미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어떤 폭력이나 고통이 없는 자연사는 ‘살아 있는 육체의 생들(생명)’이 행하는 일종의 물러섬 [은둔]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육체’는 망가진 곳을 고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새롭게 만드는 비용을 이미 훨씬 초과한 터라, 이젠 “고치기” 보다는 차라리 “1944년 신형 모델”로 바꾸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니체는 “자연사도 결국은 일종의 ‘부자연사’, 즉 일종의 자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 이외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죽지 않는다. 자연사는 다만 가장 경멸할 만한 조건들 아래에서의 죽음, 즉 자유롭지 않은 죽음, 제때를 놓친 죽음, 비참한 자의 죽음”(『우상의 황혼』) 일 뿐이다.
이러한 죽음의 대척점에 바로 ‘자살’이 있으나, 한편으로 자살을 최후의 도피처로, 달리 말해 나약한 인간의지의 행위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고통』에서 알베르트가 말한다. “고통스러운 삶을 꿋꿋하게 견뎌내기보다 목숨을 버리는 일이 당연히 더 쉬울 테지.”
하지만 베르테르는 인간 본성의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면 곧바로” 인간은 망가진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사람이 나약한지 강인한지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괴로움을 어느 한계까지 견뎌 내느냐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자유죽음』의 저자 장 아메리는 ‘자살’을 ‘우리가 마지막으로 존재에 대해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 이중의 역설이 허락하는 한, 일종의 수동태다. 없는 무엇인가를 우리는 기다린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팔짱만 낀 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수동태 문법이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문법적으로나 실제로나 적극적인 행위”라고.
이때 장 아메리가 말하는 자살은 죽음이라는 가능성의 최첨단에 위치하는데, 자살자의 삶은 “하나의 가설”이자 “의문 부호”가 되기 때문이다. 에누아르드 르베는 『자살』에서 이렇게 쓴다(이 기묘하고도 흥미로운 소설은 자살자를 ‘너’라는 2인칭으로 부른다). “늙어서 죽는 사람들은 과거의 집합체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한 것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너[자살자]를 생각할 때는, 네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이 따라온다. 너는 가능성의 집합체였고 그렇게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삶을 떠난 방식은 네 삶에 대해 반대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썼다. 너를 알았던 사람들은 네 마지막 행동에 비추어 네 지난날의 모든 행동을 다시 읽는다. (···)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너의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다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너’에게 묻는다.
“시작을 좋아하는 네가 자신을 지워 버린 것은 뜻밖의 일이다. 자살은 끝이니까 말이다. 화자는 자살자인 ‘너’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니면 너는 그것을 시작이라고 판단했을까?”
자살자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 혹은 실천이 ‘진정한 삶’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죽음 같은 것은 ‘전연 몰랐다’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정녕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그 까닭은, 사실 죽음의 체험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실제로 경험하고 또 의식한 것만이 체험인 것이다. 이 경우, 기껏해야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가능성’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언제나 ‘아직은 아닌’ 일처럼 생각하며 산다. 본래성이 아닌 일상성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거짓된 망각의 세계 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직접 대면하는 일은 이러한 망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란 ‘진정한 삶(“본래적 실존”)을 살기 위한 가능성’이 된다.
이러한 ‘가능성’의 견지에서 우리는 페소아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죽음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 삶의 잠이며, 우리 실제 존재의 죽음이다. 망자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혼동시킨다. “지금 산다고 믿는 자는 죽어 있다. 지금 죽는 자는 이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카뮈와 하이데거, 페소아 모두는 죽음이라는 탕아와 함께 진정한 삶의 가능성을 논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자살은 영원한 타자로 남아있다. 하이데거에게 자살은 “‘죽음이라는 가능성’의 그 가능성을 없애는 일”이다.
카뮈에게 자살이란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달리 말해 “인간이 더는 못 살겠는 때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살 ‘방법’이 없거나 [불가능], 살 ‘이유’가 없거나 [무의미](신형철)”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하는 무언가를 카뮈는 ‘부조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카뮈에게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부조리에 기인하는 자살은 부조리를 해소시켜” 버린다. 반대로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임과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자살에 대한 페소아의 견해도 카뮈와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에게 “죽음이란 완전히 다른 것이 됨을 의미”한다.” 그는 “모든 자살은 비겁하다”라고 덧붙인다. 삶의 부조리(불가능과 무의미 혹은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해결책이자 도피인 “자살은 우리를 전적으로 삶의 손아귀에 양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 아메리는 자살을 부정하는 견해들에 반박한다. 자살자는 “바로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끝장내려고 한계를 정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간을 갖는다. 초침이 계속 재깍거리며 가는 동안, 그의 시간은 더욱 묵직해지고 농밀해진다. “자신의 결정으로 시간이 줄어들수록, 자살자는 더욱더 많은 시간을 갖는다. ‘나’라는 자아가 더욱더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쓴다. “극단적인 선택이기는 했지만 자살을 택함으로써 [자살자는] 뛰어내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진솔한 인생을 살았다.”
또한 그는 반대로 자살을 부정하고 삶을 예찬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살아야만 한다고? 일단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고?” 이 처절한 질문에서 죽음에 대한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자연사란 “죽음을 얻지 못하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수동적인 행위다. 즉, “나는 완공 축제 때 허물어져 내릴 집을 짓는” 셈이다.
반대로 자살은 그에게 고통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조차 선택하지 못한 인간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적극적인 행위가 된다.
결국 “인생의 요구는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없는 인생으로부터 빠져나오라는 요구다. (···) 이렇게 해서 죽음은 곧 삶이 된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부정이 돌연 긍정이 된다.”
그는 이 글을 쓰고 2년 후 잘츠부르크의 어느 호텔 방에서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인간이 장수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길든 짧든 인생에는 ‘더 이상’의 시간이란 없다. 중요한 것은 충만하게 현존하는 순간의 최대치이다.” 키냐르가 남긴 말이다.
孫潤祭, 2023.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