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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Dec 23. 2023

《’편린‘에서 ’편견‘으로》

영화 <괴물>(2023)에

괴물은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변에서 괴물의 ‘편린’을 찾아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 괴상한 취미를 지니거나 별난 외모를 지닌 또래 친구들, 혹은 엄한 어른들의 부풀려진 모습들에서. 성인이 되어서는 누군가를 말만 번지르르한 꼰대에게서, ’ 내로남불‘에게서, 일 못 하는 폐급에게서··· 그러다 편린에 대한 루머와 가십은 누군가를 심지어 악인으로 몰아세워 공개 마녀재판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도 일쑤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한 ’편린‘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증하다가, 일련의 사건 이후로 그 사람이 괴물로 태어났음이 틀림없다는 ‘편견’으로 바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감독한 영화 <괴물>(2023)은 저 ’편린‘에서 ’편견‘으로 번지는 인간 사회의 산불을 다루며, 초기에 화두로써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돼지일까, 인간일까?”


플롯은 마치 동전 던지기처럼 이어진다. 전면은 체벌과 폭언을 통한 교권 남용이고, 후면은 교내 학생 간의 학교 폭력, 즉 ’왕따‘다.


<괴물>의 전반부는 학부모 사오리의 시선에서 기묘한 카프카식 답답함과 자신의 아들이 학교 폭력의 가해자일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내며 영화 <케빈에 대하여>와 유사한 심리적 스릴러를 연출한다. 교권 남용에 피해를 입은 학생과 학부모의 관점에서 학교는 인간적 공감을 배제한 규정과 절차를 앞세워 말 뿐인 사과만 급급할뿐더러, 심지어는 싱글맘의 편견을 이용해 가해를 정당화하려는 모습도 그려진다.


정리하자면, 동전의 앞면은 비인간적인 시스템과 편견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무력함과 소외감을 그려낸다. 이것으로 비롯되는 분노에 가득 찬 학부모는 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 “당신에겐 인간의 마음이란 게 없어요“ 그에게 괴물은 자녀의 학교와 담임교사다.


동전의 후면은 교권 남용의 가해자로서 담임 선생님 호리의 관점이다. 책에서 오탈자를 찾아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내기 좋아하는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에게 사소한 오해들이 먼지처럼 들러붙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성과의 데이트는 걸스바에 다닌다는 루머로, 학생의 돌발 행동을 제지하기 위한 ‘상호 접촉’은 일방적 폭력으로. 오해는 켜켜이 쌓여나가더니 심지어는 학생의 거짓 진술로 악화되어 교권 남용에 대한 공개 사과까지 이뤄진다. 학교의 일방적인 체면치레와 커다란 법적 분쟁을 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담임교사는 버리는 카드가 되었으며, 급기야는 언론에 폭언을 남발하는 악인으로 묘사되기까지 이른다.


사건의 전말은 동전의 전면도 후면도 아닌 다른 곳에 있다. 영화는 학생 미나토의 관점으로 이어진다. 그의 친구 호시카와 요리는 급우들로부터 왕따를 당한다. 요리의 아버지는 동성애적 성향을 보이는 자기 자식이 괴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요리의 동성애적 성향은 아버지로부터 ‘질병’으로 인식되어 고쳐야 할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는 요리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돼지 뇌를 가지게 되었다고 굳게 믿도록 만든다.


처음에 무기노 미나토는 이에 온정을 느끼지만 왕따에 같이 휩싸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요리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토는 자신이 겪는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서도 요리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며, 결국 이들의 관계는 자신들만의 아지트인 산속 버려진 기차에서 꽃을 피운다.


우정이 사랑으로 움트려는 그 순간에 동성애적 성향, 즉 자신도 돼지 뇌를 가진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가 미나토에게 옮겨붙는다. 이는 미나토 자신이 괴물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죄의식이 되어 이번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회의와 함께 새로운 삶(환생)에 대한 질문으로 번진다. — 이 질문은 누군가에게 또 다른 괴물이었던 교장의 말로 해소된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으니까 행복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후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던 폭풍우가 걷힘과 동시에 사건의 진상을 모두 밝힌 영화는 맑은 햇살을 받으며 초원을 뛰어다니는 요리와 미나토를 비춘다.


요리: 우리 다시 태어난 건가?
미나토: 아니, 우린 그대로인 것 같은데?
요리: 그래? 다행이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글의 서두에 던진 이 질문은 사실 틀린 문장이다.

둘 중 하나도 참으로 성립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괴물이 있다고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괴물을 만난다고.


孫潤祭,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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