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2005)에 덧붙임
인간의 망각은 두 번 이루어진다. ”잠시 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잠시 후면 모든 것이 너를 잊게 될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제7권 §21)
망각은 인간의 삶을 통틀어서 이겨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특히 무엇을 배워나가는 과정에 있어 인간은 망각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심지어 망각은 인간적 죽음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옛 그리스인들은 죽으면 레테의 강에서 생의 기억을 모두 씻어 냈다고 믿었다고 한다. 망각(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쓰고, 기록하고, 각인하고, 창조해 왔다.
하지만 망각에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망각은 과거의 무언가를 지워냄으로써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공간, 혹은 여백을 확보한다. 즉 망각은 무겁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짐을 덜어냄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여백(tabula rasa)을 확보하는 망각의 능력을 니체는 ‘삶을 위한 억제력‘이라 규정했다. “시간이 약이다”는 바로 이럴 때 통용되는 말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조엘(짐 캐리 역)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이 알렉산더 포프의 인용구에서 비롯된 것과 같이: “세상을 잊고 세상에 잊힌 자. 티 없는 마음에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내리쬐니.”
이 영화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스케치는 아름다웠을지 몰라도, 채색과 덧칠은 지독하고 처참했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역)의 사랑이 저 여백(tabula rasa)에서 다시 그려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A: 난 완벽하지 않아요.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일 뿐이죠. 완벽하지 않다고요.
B: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어요.
A: 보일 거예요. 곧 거슬리게 될 테고 난 지루하고 답답해하겠죠. 나랑 있으면 그렇게 돼요.
B: (어깨를 으쓱하고) Okay.
A: (잠시 망설이다가) Okay.
孫潤祭, 2024. 01.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