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빗대는 또 다른 영역이 참 많다. 소설, 드라마, 영화, 공연…. 그 안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는 우리 삶의 일부다. 현실보다 좀 더 아름답기도 하고 때로는 더 잔혹하기도 하다. 모든 이야기는 극적 재미를 위해 가공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대 위 배우의 연기를 통해 조금은 낯설지만 흥미로운 세상을 만나보길 원한다. 다만,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생의 한 단면만이 허락된다. 다소 집약적이고 함축적인 형태로.
흔하디 흔한 평범한 일상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내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곳에 어떠한 ‘가치’가 존재할 때, 사람들 마음에 닿고 의식이 환기되고 또 그것이 감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공연을 만드는 과정 중, 작품의 콘셉트(CONCEPT)를 뽑아내는 작업은 상당히 중요한 단계다. 작품을 대표하는 중심 생각,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는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식상한 사고의 틀은 벗어나되 대중의 마음을 건드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그래야 힘이 생기고 매력적이다.
또한 콘셉트가 아무리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라 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현실적인 요소들을 반드시 염두해야만 한다. 텍스트로는 어떠한 상상의 세계도 펼칠 수 있지만, 무대 위에선 제한된 시공간 속 배우/스태프가 손발을 맞춰 함께 그림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하나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신선함으로 대중을 자극하되, 함께 즐기고 호흡할 수 있을 만큼만 앞서야 한다는 점이다.
고1 때, 뮤지컬 세계를 처음 봤다. 그때 만난 작품이 <Cats>다. 부조리로 가득한 그들의 삶은 인간 세상 그대로였지만 표현 방식이 정말 새로웠다.
화려한 몸짓을 뽐내던 고양이들이 휴식 시간 객석을 누볐다. 관객들의 신발 끈을 풀고 몸을 비비며 친근감을 표하니 처음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하지만 동시에 기분 좋은 설렘도 느꼈다. 놀라운 것은, 배우들의 눈빛과 움직임이 결코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고양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인생 최초의 상업 뮤지컬이기도 했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을 만큼 그 첫 순간의 강렬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콘셉트의 강렬함을 잘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100% 공감한다.
반면, 정말 새로웠지만 조금은 너무 앞서 나가 아쉬움을 남긴 작품도 있다. 2002년 브로드웨이 화제작으로 소개된 퍼포먼스 뮤지컬 <델라구아다>이다. ‘델라구아다(De La Guarda)’는 스페인어로 ‘수호천사’라는 뜻이다. ‘하늘을 나는 배우’와 ‘서서 보는 관객’이라는 파격적인 관람 형태를 띠고 있다.
1995년 아르헨티나 드라마 학교 출신 배우들과 암벽등반가, 서커스 단원 등이 함께 모여 세계 각지의 공연 페스티벌에 참가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남녀 배우들이 1시간 30분 동안 줄에 매달려 허공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10m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며 ‘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배우가 직각으로 벽을 타고 오르기도 한다.
관객과 배우의 자리 경계가 없고 배우들이 관객들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타악 소리, 테크노 음악, 라틴 리듬이 어우러져 흡사 열광적인 콘서트의 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때가 되면 배우들이 하늘에서 물을 뿌리기도 하고.
결과는 어땠을까. 2002년은 월드컵의 열기와 함께 온 국민이 하나이던 때이다. 옷이 흠뻑 젖어도 즐거워하는 스타들의 모습을 앞세워 초반 객석 점유율은 98%를 기록할 만큼,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일부 관객들은 자발적 참여가 아닌 억지로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 같다며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밀폐된 공간에서 계속 서 있어야 하는 부담감에 난색을 표하는 경우도 많았다.
2002년, 그때만 해도 스탠딩 공연 문화가 대중에게는 아직 낯선 분위기였다. 10개월 동안 10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음에도 계절적 요인과 함께 관객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4주간의 휴지기 후 재개된 지 약 3개월 만에 결국 폐막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델라구아다>는 기본적으로 높이가 15m 이상이 되는 직육면체 모양의 극장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국내에는 마땅한 극장이 없었다. 이에 제작사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옥외 주차장 부지를 찾아냈고, <델라구아다>만을 위한 극장을 새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외국 공연을 위해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을 내준다니 서울시의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세종 문화회관에서 델라구아다 전용극장을 3년간 무상임대 방식으로 내주고, 이후 극장은 세종문화회관에 귀속된다'라는 합의하에 결국 성사될 수 있었다.
전용극장, 로열티 등 사전제작비만 59억 원에 이르고, 4개월간 오리지널팀 공연 운영비가 14억 원, 이후 1년간 공연에 약 91억 원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수익을 위해선 장기 공연은 필수였다. 최소 4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야 했다. 그러니 이른 폐막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비록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기는 했지만 시대를 앞선 안목은 공연기획자, 프로듀서가 갖춰야 할 중요한 자질 중 하나이다.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찾아내고, 시장의 변화와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감각, 또 마켓을 분석할 줄 아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
<델라구아다>의 한국 공연 프로듀싱을 맡았던 설도윤 대표는 국내 최고의 흥행사로 평가받는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이다. 한국 뮤지컬 산업을 개척하고 성장을 이끈 장본인으로 언제나 시장의 흐름을 먼저 읽는데 탁월하다.
설 대표는 2013년 뉴요커들이 열광한 또 하나의 넌버벌 쇼를 국내 관객에게 선보였다.<푸에르자부르타(FuerzaBruta)>.무대와 객석 경계를 허물고 벽, 천장 등 모든 공간을 무대로 활용하는 ‘인터랙티브(쌍방향) 퍼포먼스’.빌딩 숲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모티브 삼아 만든 것으로, 이전 <델라구아다> 팀의 새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음악, 춤, 아크로바틱, 파격적인 시각적 장치와 독특한 무대 디자인을 활용해 스펙터클 하고 화려한 비주얼을 보여주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질주하며 벽을 부수거나, 공중 수조 속에서 워터쇼(Water Show)를 펼치기도 한다.
<푸에르자부르타>는 2013년 내한 당시 개막 한 달 만에 누적관객 4만 명을 돌파하고 작품성까지 인정받아 그 해 ‘대한민국 문화 연예 대상’에서 외국 작품상까지 수상했다. 이런 큰 인기에 힘입어 2018년, 2019년에 서울에서 재공연도 성사됐다.
김난도의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는 “수많은 뮤지컬과 공연의 홍수 속에서 <푸에르자부르타>는 무대 공간을 재정의하여 관객몰이에 성공했다"라며 입체적인 공연문화와 오감을 만족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대표적 사례로 <푸에르자부르타>를 뽑기도 했다.
언뜻 기획력이라고 하면, "신박" 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만을 떠올린다. 중요한 것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하나의 생각(아이디어)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실현성 있는 것으로, 뚜렷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모든 활동을 다 포함한다.
특히, 공연 기획은 하나의 계획을 수립하는 것에서 끝이 아니다. 무형의 아이디어를 콘텐츠화하고, 필요한 자금 마련에 대한 고민은 물론, 허락된 예산 범위 안에서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 요구된다. 시기적으로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력(배우/스태프)을 투입해야 하고, 여러 도구(홍보/마케팅)를 활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러니 공연기획자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 트렌드를 파악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잘 관리하는 경영 마인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당장에는 이 모든 게 어렵게만 느껴지겠지만, 사회에 관심을 갖다 보면 서서히 체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평소 뉴스도 많이 보고, 문학 작품도 읽고,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