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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i N Jun 11. 2021

한없이 낯설어지는 것

나는 툴루즈 로트렉에게 은밀한 부러움을 느낀다




최근에 펼쳐본 고등학교 시절 일기장은 잘 보관해둔 덕인지, 책갈피에서조차 수년 전에 뿌린 향수 냄새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함께 묵혀둔 줄로만 알았던 정서는 증발했다. 더는 흑연이 부러지도록 갈겨쓴 글이 잘 와닿지 않았다. 어떤 심정으로 피를 토해내는 듯한 문장들을 적어 내렸는지, 낯선 단어들을 내 것처럼 써댔는지, 적절한 비유와 어색한 은유를 어떻게 골라냈는지. 모두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감정만이 어슴푸레하게 아른거릴 뿐이다.


새것은 언젠가 헌것이 된다. 시간을 거쳐 익숙해지고, 당시의 폭발적인 신선함을 느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남기기 위해 애쓰지만, 그마저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로 인해 곡해되며, 심지어는 스스로 옛 기록이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낯섦은 새로움과 사뭇 다르다. 과거에 썼던 언어, 행동, 습관, 사고, 그 무엇 하나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이 타자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는 개괄적인 생각으로 넘어가려고 해도 내가 당장 죽는다면 과거의 나 역시 그 아래 함께 묻힐 수 있을지 의문이 꼬리를 잡는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이다. 디자인과에 진학한 이유를 대라면 한 시간도 넘게 떠들어댈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완전무결한 진실일 수는 없다. ‘사실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온 건데.’ 이 보잘것없는 비밀을 그럴싸하게 감추기 위한 포장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 안에 관념적으로만 존재했던 디자인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내가 학습한 것을 수용적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보며 형성된 의견은 어느 정도 나의 믿음이자 철학이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어디든 드로잉 노트를 들고 다니며 보이는 모든 걸 그렸던 나와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이 눈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그가 생전 남긴 작품들에서 한결같은 애착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말년기까지의 삶, 시대상, 다른 화가 등이 작품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많은 말이 오가지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든 툴루즈 로트렉은 툴루즈 로트렉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사십 년을 채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지만 수천 점의 그림을 남겼다. 이는 드로잉을 제하더라도 천 점이 넘으니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이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그림에서도, 그를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끌어올린 석판화 작업의 포스터에서도 로트렉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마치 그의 그림은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목적과도 같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건 로트렉이 가진 그림에 대한 애정이었으리라.


로트렉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내몰리고 비난을 받기 쉬웠던 하층민을 화폭에 담아내면서도 그림에 편견이나 아니꼬운 시선을 주입하지 않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로트렉이었던 순간이 없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알아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고자 대상과 그림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쉽게 그려진다. 여기에서 ‘눈에 비치는 그대로’라 함은 단지 정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듯 똑같이 묘사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영혼으로 인식하기에 드러나는 현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말한다.


어떻게 로트렉은 이토록 그림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일견에선 그의 선천적인 건강 문제와 사고로 멈춘 성장이 틀에 박힌 귀족 생활 ― 승마, 사냥 등을 누리지 못하게 했고 남은 선택지는 어렸을 때부터 즐기던 그림밖에 없었을 거라 말한다. 이는 드로잉으로 자유를 샀다는 로트렉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분명 그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면 이리도 변함없고 견고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감히 생각해보건대 한 폭의 그림에 스민 애착은 그림 그리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삶과 인간사로 확장된다. 무의미한 가정임을 알면서도 ‘내가 만일 그의 삶을 살았더라면…….’하는 문장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벨 에포크라 불리는 풍요로운 시대를 영유했다 한들 인간에게 염증을 느낄 법도 한데, 로트렉은 회의주의적인 시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잡지사에 풍자 그림을 기고하곤 했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유쾌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는 삶이 숨 참기와 같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우리는 있는 힘껏 숨을 참으려 해도 얼마 못 가 헐떡이며 호흡하기 마련이다. 사는 일도 다를 바 없다. 슬픔과 분노에 점철되어 모든 것을 놓고 싶은 한계가 다가와도, 이는 별안간 곁으로 돌아온다. 마치 오래 참은 숨을 급하게 들이쉴 때처럼 삶의 고동은 어느 때보다 헌신적으로 빠르게 울린다.


동시에 그가 가졌을 외로움을 떠올려본다. 로트렉이 사람들이 가진 가지각색의 감정을 그릴 수 있었던 건 본인 역시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쾌활한 작품도 많을 텐데, 그중 수심에 빠진 매춘부의 얼굴과 지친 듯한 세탁부의 옆모습, 침대에서 서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두 동성애자가 유독 시선을 끄는 이유는 그림에 녹은 섬세한 정서가 작가를 투영한 탓일까, 관람자인 내가 공허함을 느끼기 때문일까. 그가 고독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 함부로 추측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은 로트렉이 말년에 환락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요절한 것이 불쌍하다며 그가 평생 애정을 갈구하며 살았을 거라 말했다.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인 동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로트렉에 대한 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툴루즈 로트렉, 〈침대에서 Le Lit〉, 1892년, 판지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그러나 연민할 수는 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에 외로움이라 이름 붙이기를 꺼려하고 늦출 뿐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으레 그렇지 않던가. 고작 5분이 지나는 동안 초침이 300번을 움직이는 걸 자각하지 않고 살 듯, 쓸쓸함을 느끼는 순간이 의도치 않게 모여 이는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과 고독이 된다. 로트렉은 그렇게 알아채기 힘든 일순을 포착하여 아주 솔직하게 담을 수 있었고, 이는 그의 풍부한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그와 같이 진솔한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그저 재밌다는 이유로 눈에 띄는 사람을, 풍경을, 물건을 닥치는 대로 드로잉하던 때가 흐릿하다. 지금은 겨우 그림 한 장 그리는 일도 벅찬 일이 되었다. 순수 미술은 돈벌이가 힘들다는 말에 디자인과를 선택하고, 진학하기 위해 디자인을 할 구실을 붙이고, 입학 후에는 내가 가져야 할 디자인적 사명감을 만들고……. 과연 나는 과거에 그림을 사랑했듯 디자인을 애정하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선뜻 아니라고 하기도 힘들다. 내가 나에게 솔직하지 않았던 결과가 이렇다. 


살면서 얼마나 나 자신을 속여왔는지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지만, 거듭할수록 나와의 거리를 가르고, 저 멀리 떨어트릴 뿐이다. 따라서 늘 그랬듯이 ‘지금부터라도…….’ 하는 일말의 기대를 하며 진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낯선 과거는 다시 이게 네 것인 줄 아느냐는 비웃음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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