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역사상 최악의 사기 범죄, 조희팔 사건
나이란 것을 먹어가면서 점점 돈의 필요성이 크게 체감되곤 한다. 돈으로 많은 것들이 좌우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돈이 없다는 건 그만큼의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돈에 눈이 멀어 돈만을 쫓는 인생이 되어선 안 된다. 특히나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어서는 더욱 안 된다.
그런데 그리 오래지 않은 2000년대 초반, 7만여 명의 피해자를 만들어냈으며 그중 30명 이상을 피해자가 자살까지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역사상 가장 큰 피해금액(약 5조)을 기록한 조희팔의 사기 사건이 그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조희팔은 1957년 경북 영천에서 4남 4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고 한다. 워낙 가난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대구로 넘어간 조희팔은 10대 때부터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냉동식품 도매업소에 취직한다. 이후 도박판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폭력조직원들과 안면을 익힌 그는 이때 처음 이른바 '다단계'를 접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친형이 속해 있던 다단계 업체 'SMK'에 들어가 다단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이 'SMK(숭민코리아)'는 한국 다단계의 원조로 조희팔 이전 가장 큰 피해액(약 4조)과 피해자를 양산했던 'JU그룹'의 주수도 역시 이곳에서 다단계를 접했다고 한다.
아무튼 조희팔은 2004년부터 직접 다단계 사업을 시작하는데, 회원들이 의료기기를 구매하면 이것을 병원 등에 빌려주어 수익을 낸다는 수법이었다. 대구경북 쪽에서는 (주)첼린, 부산울산경남 쪽에서는 (주)씨엔, 서울경기및 충청쪽에서는 (주)리브 라는 업체명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회원들이 의료기기를 구매하고 다른 회원을 끌어들이며 전국적으로 약 49곳에 센터를 설립하였고, 이것으로 이자를 주며 회원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후에는 전국 모텔이나 찜질방 등에 의료기기를 설치하고 임대수익을 올린다고 홍보하였지만 수익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뒷사람에게 받은 돈의 일부를 앞사람에게 수당으로 지급하는 다단계 정확히는 '폰지 사기'는 애초에 인구 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는 조희팔의 행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조희팔은 수익금이 중단되는 시점은 언제인지, 그리고 피해자들이 수익에 대해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는 얼마나 걸릴지를 미리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실시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조희팔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피해 금액은 밝혀진 것만 경상도쪽에서만 1조원, 수도권쪽에서 1조2천억원 등 약 5조에 달하는데, 피해자들의 모임인 '바른가정경제실천을 위한 시민 연대'는 2배에 가까운 최소 8조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희팔은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2008년 10월 회사 전산망을 고의적으로 파괴한 뒤 자산을 모두 현금화하여 도주를 시작했고, 11월부터 경찰이 수색을 시작하자, 12월 9일 태안 마검포항에서 중국으로 밀항하여 사라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조희팔이 사라진 뒤 검경이 조희팔의 도주를 도았다는 정황이 속속 들어났던 것이다. 2008년 10월, 대구지방경찰청 수사과장이 조희팔에게 9억에 이르는 수표를 받았다고 밝혀졌는데 이 사람은 조희팔이 검거되었다면 조희팔 사건을 수사하는 주체가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조희팔이 태안에서 밀항하는 것을 해경이 정말 몰랐을 것이냐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태안해양경찰서장이 직위 해제되기도 했으나 이 양반은 네 달 뒤에 복귀하여 강원지역 해경 서장으로 근무했다. 중국까지 조희팔을 추적했던 대구지방경찰청 소속 정 모 경사 역시 조희팔을 찾아내서 검거한 것이 아니라 골프와 술을 접대받으며 놀다 온 것이 확인되며 2012년 9월 구속되었다.
이런 추태는 검찰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서울 고검 김 부장검사는 조희팔의 측근에게 2억 7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대구지검 서부지청의 총무과장 오모 서기관은 약 10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다.
조희팔의 피해자 중에는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할머니가 보상금으로 받은 2억 4천만 원을 친구의 권유로 여기에 투자했다가 모두 날렸고, 결국 남편마저 충격으로 쓰러져 4년만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은 조희팔이 중국으로 밀항한 지 4년만인 2012년 5월에 전해진다. 조희팔이 이미 2011년 12월에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조희팔의 유족은 조희팔이 원한관계에 있던 세력의 청부살인으로 사망했다며 조희팔의 장례식 영상을 찍어 보냈다. 그런데 웃긴 것은 굳이 장례식 영상을 찍은 이유는 무엇이며, 굳이 얼굴이 잘 보이게 투명한 관 뚜껑을 덮은 이유는 무엇이냐는 점이다. 게다가 2011년 12월 19일에 사망했다는 사망검증서에는 중국 공안의 인증 도장이 없다는 점과 화장인증서에는 2011년 12월 21이 아닌 12월 11일로 적혀 있었다(죽기도 전에 화장부터 한 것인가?)는 점 등으로 인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 투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유골의 DNA 감정까지 진행했지만 화장으로 인해 유골이 손상되어 DNA 감정은 실패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서는 2015년 10월 조희팔을 대놓고 추격하기 시작하며 중국의 '웨이보'에 홍보한 결과 조희팔을 목격했다는 수많은 목격담이 쏟아졌다. 조희팔의 단골 골프장 역시 조희팔 사망 이후에도 조희팔이 사용한 기록이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희팔의 최측근이었던 강태용과 배상혁 등이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조희팔의 생사여부를 규명할 핵심 증인인 조카 유모 씨는 10월 20일 숨진채 발견된다.
이처럼 많은 의혹 속에서도 2016년 검찰은 조희팔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게다가 조희팔과 연관되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고위 검, 경 간부나 정치인들은 모두 '혐의 없음'으로 종결해 버려 검경이 수사할 생각이 없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의 의혹처럼 조희팔이 살아있고, 죽은 척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라면 조희팔은 5조~8조에 이르는 사기를 치고도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사는 희대의 완전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 된다.
무려 7만 명 이상의 피해자들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간사한 입놀림으로 빼앗아 좌절과 절망감을 안겨준 뒤 도망쳐 어쩌면 지금도 살아서 키득거리고 있을 조희팔의 이야기를 정리하며 '천망회회소이불실'이라는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그 그물을 빠져나가지는 못한다'는 말처럼 그가 꼭 반드시 부디 제발 자신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