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에는 오래도록 만남을 이어온 벗들과 두 번의 여행을 다녀오며 뜻있는 시간을 가졌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모임은 대학동기들로 함께 해 온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고, 일박으로 국내여행을 짧게 다녀온 팀은 20년 가깝게 정을 이어온 건축사 동료들과 함께 했다. 두 모임 다 이제는 환갑을 넘겨 노년에 접어들어 모두 함께 할 시간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서글픔이 깔리고 있다.
하필이면 두 모임의 여행길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여행을 같이 했었지만 진지하게 자신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그런 자리를 가졌던 건 우연의 일치였을까? 대학 동기들도 40년이 지나도록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었고, 건축사 동료들도 그러했었다.
지금까지는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대학 동기들과 모임을 시작했을 그때는 20대였고, 건축사 동료들은 40대와 50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동기들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고, 건축사 동료들도 맏형은 팔순, 막내도 환갑을 지나 곧 칠순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큰 병을 앓은 사람들이 없지만 지금은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있다. 모임은 함께 할 때 어떤 자리도 의미가 있으니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흔들리게 된다.
건강이 점점 무너지는 나이에 접어들다 보니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으며 남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나 보다. 어쩌면 얼마나 오래 만나 왔는지 보다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두 모임이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속을 내보이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일곱 명의 친구, 어떻게 마흔 해가 지났단 말인가? 이십대의 풋풋한 청춘으로 만나 일흔을 앞 둔 나이가 되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한 사람이라도 나쁜 병을 얻게 되거나 모임에 발걸음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사이로 남게 될까? 멀리 살아서 자주 보지 못해도 자주 통화를 하거나 sns로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하루 일과를 전하는 벗도 있다. 어제 통화 목소리가 다르다며 안부를 묻는 사이라면 20년 지기나 그보다 더 오랜 모임을 가진 친구보다 낫지 않을까?
처음이다시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리를 만들었다 보니 얘기를 이어가는 게 원만치 못했다. 여러 사람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자리는 말하기보다 잘 듣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제도 중구난방, 잘 들어주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도중에 끼어들기도 하다 보니 속을 들여다볼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아쉬운 첫자리였지만 다음을 기약하면서 이런 자리가 이어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오래 만나왔는데 서로 아는 게 없으면
참 이상한 사이로 만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과 20년, 40년이다. 평소에는 거의 통화도 한 번 없다가 단톡방에 집합 명령이 떨어지면 한 명도 열외 없이 모인다. 두 모임 다 정기모임이 따로 없어 번개모임으로 날짜가 통보되는데 빠지면 역적이 되는 분위기이다. 참 희한한 모임이지 않은가?
혹시 나만 연락을 주고받지 않을 뿐 다른 멤버끼리는 자주 만남이나 연락을 주고받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눈치를 보면 몇몇은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전체 분위기는 그래 보인다. 모이면 좋고 만남이 없으면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지내왔으니 나는 이 두 모임의 아웃사이더 멤버인 것 같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하는 시간은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모임을 시작했을 땐 40대, 50대 였는데 이젠 환갑이 지나고 맏형은 칠순을 넘겼다. 하릴없이 지나는 세월을 어찌하겠는가?
대학동기 모임은 학연으로, 건축사 동료 모임은 같은 직업인으로 엮여 있다. 그동안 몇 번인지 헤아리기 어렵지만 탈퇴할 생각을 결심까지 갔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생각을 접었던 이유는 정기 모임으로 만나는 의무를 요구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보름을 입원했었어도 개별로 병문안을 오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이 모임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도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신을 해도 될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20년, 4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일대일 관계에서 의미를 따로 찾을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만남을 지속하는 벗이 있다는 것으로 이 시대의 사람 관계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서로 속을 내놓고 해야 할 이야기
우연찮은 일치로 속을 드러내고 얘기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던 여행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지 이번 여행에서 속내를 내놓고 말 좀 해보자는 자리가 있었다. 어떤 얘기를? 무슨 말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더듬거리듯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다. 누군가는 듣고 싶었던 얘기일 수도 있고 아무렇게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얘기를 막 해서는 안 되고, 들어줄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서 말해야 했다. 모두가 경청해 주면 참 좋았겠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어서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얘기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20년 지기, 40년 지기라면 어떤 얘기라도 할 수 있었어야 하는 사이가 아닌가? 칠순을 바라보고 팔순이 눈앞인 나이에 접어들어 말문이 막히고 들어주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서글픈 만남이 아닌가 싶다.
40년 지기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베트남 붕따우, 3박을 풀빌라 개인 방에서 보내며 그냥 쉬며 보낸 럭셔리한 여행이었다.
왜 얘기를 나누어야 하는가? 나이가 들수록 외롭기 때문이다. 부부, 자식이라는 가족도 대화를 나누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런지 모르겠다. 부부가 각방을 쓰고, 자식들도 제 사는 게 바빠서 밥 한번 같이 먹는 것도 쉽지 않은 게 요즘 세태이다. 그런 외롭고 쓸쓸한 일상이 나이 든 사람들이 안고 살아가는 근심이지 싶다.
세상에 온 건 순서가 있어도 가는 건 누가 먼저 일지 모른다. 환갑이 지난 사람들이 안고 살아가는 한 가지 바람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일 테다. 40년 지기, 20년 지기로 만남을 이어가면서 속을 내놓아도 좋을 사이가 아니라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서로에 대한 관심도 없이 만나자고 하면 참석하고 들어도 그만 듣기 싫으면 말문을 막는 사람이라면 왜 만나야 할까? 이번 두 모임에서 시도한 말 좀 해보자는 자리는 앞으로 이어져야 할 바람직한 시도로 받아들이고 싶다.
칠순, 팔순이 멀지 않지만 그 나이에 누가 가고 싶을까? 누구도 바라지 않는 말 없는 사람의 관계인데 속을 내놓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20년 지기라면, 40년 지기라면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전화기를 손에 들고 살면서 일 년 내내 통화 한 번 하지 않고 지내니 얼마나 기가 막힌 사이인가?
문득 생각나면 전화를 넣을 수 있는 친구, 밥은 먹었느냐고 지나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들어주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친구가 하는 얘기라면 시덥잖은 말일지라도 귀기울이고 들어줄 수 있는 막역한 사이로 지냈으면 좋겠다. 맛있는 밥집을 찾았으면 친구가 생각나는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친구 목소리만 듣고도 마음을 알아줄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감기에 걸려 기침하는 소리는 알아채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