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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제경 Sep 19. 2024

짜증에 관하여

낙관에 관하여

어쩌다 보니 다시 백수가 된 요즘, 도서관에 나가 늘어짐을 극복하려 애쓴다. 휴관일에는 카페를 간다. 그렇다면, 주인장 복장과 표정이 여유로운 카페를 찾는 것이 좋다. 대체로 손님이 없어 오래 머물러도 폐가 되지 않고, 주인장은 지인들을 불러 수다 떨기 바쁘므로 서로 간 눈치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방문한 카페는 수개월 전 시험 준비 중 발견한 곳인데, 어머나 세상에.


앉을 자리가 궁할 만큼 사람이 많다. 소곤소곤이 웅성웅성까지는 괜찮았는데, 이윽고 여기가 카페니 시장통이니. 이어폰을 안 끼다 끼다 볼륨을 최대로 높이다 더 높이려다 보니, 짜증이 확 밀려온다. 내가 이러려고 카누 대신 4,500원 아메리카노를 사 먹나. 탁자를 함 쾅하고 칠까. 다 들리게 궁시렁 대볼까. 뭐 그러면서.


펴둔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런저런 짜증만 적립된다. 그러고 보니 돈도 아낄 겸 집에서 할까 싶던 1시간 전, 이불 빨래 한다던 어머니의 침입도 짜증나고. 그래서 이 시끄러운 카페를 고른 나도 짜증나고. 어제부로 3연패 한 야구도 갑자기 짜증나고. 그래, 지난주에 드럽게 막히던 경부고속도로도 짜증나고. 온갖 짜증을 다 끌어모아 짜증을 가중시킨다. 이 기세라면, 신생아실에서 내게 불친절했던 간호사도 찾아내 짜증낼 기세다.


지금 내 짜증의 가장 큰 원흉은 누구인가. 커피 빨대를 이쑤시개처럼 쑤시고 있는 저 아저씨인가. 이 더운 날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는 2~3초를 제외하고는 음역대가 점점 높아지는 저 소프라노 아주머니인가. 1시간 전, 나를 카페로 유도한 어머니인가. 이불인가. 아니면 옛날옛날 신생아실 간호사 누나인가. 진범 없는 진범 찾기에 지쳐 커피나 홀짝이니, 오래전 깨달았다 지금은 까먹은 깨달음이 상기된다.


짜증이란, 빨리 털어낼수록 영리하다. 그 기분으로 뭘 하든 망치기 십상이다. 애먼 데 불똥 튀기기도 십상이와 맞불이 생기기도 산불이 되기도 한다. 불은 대개 피해만 남기기 십상이다. 짜증이 캠프파이어의 훈훈함으로 번지는 일은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다. 단지 멀리해야 할 존재다.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짜증에, 우리는 대개 좋다며 불구덩이로 뛰어가 기어코 산불로 만든다. 산불은 알다시피 산을 다 태워야 끝난다. 짜증에서 발현된 비관이 더 큰 비관을, 또 다른 비관을 양산하다 스스로를 사면초가로 도태시킨다. 인간과 인간이 싸우는 이유가 대개 별 게 아니듯. 인간이 망가지는 이유 또한 대개 별 게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짜증도 만성이면 망가지기 십상이다.


엎어진 물은, 이러나저러나 조삼모사다. 짜증 내봐야 발등 찍기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미래는 수습하는 삶에 그친다. 그것만큼 우매한 것도 몇 없다. 중요한 건 역시 앞으로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자. 그리고 앞으로를 고민하자, 라는 말이 꽤나 이론적이고 이상적이라는 것을. 그 말을 하고 쓰는 나도 모르지 않지만, 내가 찾은 방법 또한 이뿐이다. 낙관.


낙관, 이라면 불을 끄는 건 모르겠고 번지는 건 막을 수 있다. 낙관한다는 건, 어금니 꽉 깨물고 웃는 것이 아니다. 짜증났던 일에서도 배울 점을 찾고, 알게 된 사실에 반가워하며 앞으로에 적용해볼 요소로 대입해 본다. 시행착오를 미리 겪은 격이니,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도 사라진다. 낙관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긴 사람은 자기객관화에 용이해지고, 자기객관화에 용이해진 사람은 판단력이 선명해진다. 낙관할 줄 아는 사람은 행실은 물론 앞으로를 기대하게 한다.


카페를 나간 덕에, 그래서 짜증이 났던 덕에 늘어지지 않고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카페에 사람이 많았던 덕에, 그래서 짜증이 났던 덕에 쥐어짜 낼 뻔했던 이번 주 마감 소재를 찾을 수 있었다. 이어폰 소리를 키운 덕에, 그래서 짜증이 났던 덕에 집중에 용이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 도서관 휴관일에는 카페를 나가고. 앞으로 조금 더 구석진 카페를 찾아. 앞으로 이 기회에 찾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해야겠다.


마지막 문장을 적을 차례가 되니, 북적이는 카페를 간 것이 참 다행인 날이었다.

 

그런데 야구는 졌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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