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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주인 May 03. 2024

훅 들어온 아내의 질문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남편 혼자만 탈출할 수 있다면 어떡할 거야?"


아내의 질문이 훅 들어왔다.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난 위기대응에 강한 남편이다. (두둥!)


어젯밤 일이다.

회사일 끝내고 운동하고 좀 늦게 집에 왔다. 아내는 네플릭스를 보고 있었는데 유아인이 나오는 영화였다.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지는 재난영화 같았는데 중간에 봐서인지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 갔지만 그냥 봤다. 난 집에 오면 TV 앞에서 멍 때리는 게 힐링이다.


혼자 탈출할 수 있었던 유아인이 떠나지 않고 여자친구(안은진)와 혼인서약을 하는 장면에서 아내가 '미끼'를 던졌다.

"만약 저런 상황이 오면 오빠는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우리 마눌님을 두고 어디를 가?"

이럴 때 말이 길어지면 안 된다. 최대한 간결하게, 무심하게. 툭!


그리고 회심의 한 방을 더 날렸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대 상황이 생기면 마눌은 꼭 가"

아내는 별 대답 없었지만 표정은 좋아 보였다.


'어쭈 요즘 말발이 좀 늘었는데?, 아주 잘했어' 나 자신에게 칭찬한다.


사실 예전엔 내가 말하는 화법이 쎄서 아내가 힘들어했었다.

공대생 DNA에 일에 몰입했던 시기가 꽤 길었다. 그땐 말은 '맞다' '틀리다' 둘 중에 하나로 무조건 결론이 나야 했다. 회사의 언어와 가정의 언어를 구분하지 못했다. 집에서도 회사처럼 대화했고 아내의 다름을 공감해주지 못했었다.


이러한 나를 아내가 많이 아프고 아주 위험한 상황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수업료를 아주 많이 내고 알았다. 대화의 결론보다 대화의 과정과 감정이 더 중요함을. 

아내가 아프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못 봤던걸 보는 눈을 가지게 됐고 못 느꼈던 감정을 알게 됐다.

'아내는 왜 자꾸 아프기만 할까' 불만에서 지금은 '이 정도만이라도 다행이야'라고 감사함을 느낀다.                

    

잠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옷방에 가니 건조기에 빨래가 그대로 있었다.

예전에 나였으면 모른 척했을 거다. 안 좋은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을 거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그 자리에서 개었다.  

내가 좀 더 괜찮은 남편이 된 건가?


좀 늦게 자긴 했지만 편안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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