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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Mar 21. 2023

교수님, 사람이십니까...?

돌머리 원생의 돌 깨기 시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현타

자연어 처리 기반 인공지능으로 함의(entailment)의 예시를 찾는 수업 중에 다룬 카카오톡 기반 ChatGPT 'Ask up'과 나눈 대화

익숙한 사람의 새로운 모습에 낯섦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요즘이 그렇다. 매일 마주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지도교수로부터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 갑질을 당했느냐고? 아니다. 지도교수가 밟아간 삶의 흔적 앞에서 내가 가진 능력이 너무나 보잘것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석사 과정도 2 차수에 접어들었다. 다행스럽게 졸업 논문의 방향도 얼추 잡은 것 같고 가장 핵심이 되는 아이디어도 윤곽을 그려가고 있다. 2 차수까지의 목표는 관련 배경지식을 최대한 많이 쌓고 목차와 연구방법을 잡아 지도교수로부터 연구 승낙을 받는 것이다.


저녁에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보통 밤 9시 언저리가 된다. 마치고 나가는 길에 연구실에 잠시 들러 한 주 동안 읽고 이해한 바나 궁금한 것을 묻곤 한다. 어제도 수업이 끝나고 연구실에 잠시 들렀을 때였다. 연구 주제로 환유(metonymy)에 의한 인지적 오류를 다루겠다고 밝히던 차였다.


혹시 내 박사 논문 읽어봤니?


지도교수는 특유의 천진한 표정과 말투로 내게 물었다. 지도교수의 논문이니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쪽수가 가히 책 한 권인 데다가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라 초록을 읽고 이해한 바를 말하던 참이었다. 이미 내가 답변을 하는 와중에도 교수는 책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자, 한 번 읽어봐.


교수는 책 한 권을 건넸다. 제목은 익숙해 보였으나 목차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논문의 제목이 보이지 않는다.


교수님, 이건 어느 분이랑 같이 쓰신 거예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지도교수 쪽이었다.


이게 논문이야. 논문이 괜찮으면 책으로 바로 낼 수 있어.


박사 후 과정도 아니고, 학위 논문이 곧바로 책으로 출판되어 여기저기서 읽힌다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니, 사실 알고는 있었다. Langacker나 Goldberg와 같이 인지언어학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학위 논문은 수십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초판의 말을 수없이 인용할 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결코 나의 지도교수를 의심하거나 아래로 보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늘 마주하는 사람 중 한 명이 그토록 학계에서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마주하니 참 느낌이 새로웠다. 뛰어다는 것을 말로만 듣는 것과 실물로 마주하는 것은 제법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마, 그간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 싶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니 학부생 수준의 얕은 지식을 가지고서 나도 적잖이는 기고만장했다. 꽤나 뭐라도 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교사들이 학교에서 느끼는 바가 그렇듯이, 학교에서 다루는 교육과정 내의 내용들은 교사든 교수든 자신의 역량에 비하면 한없이 얕은 수준이다. 그래서일까, 교수가(지도교수든 다른 교수든)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하여 원 없이 펼쳐낸 글들을 읽다 보면 글이 나아가고자 하는 생각의 깊이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여 어딘가에서 정신을 잃곤 만다.


교수들의 말과 글은 급하지 않다. 급하지 않지만 굽이치고 굽이치는 힘은 강해서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게 만든다. 많이 읽지 않고서는 말들의 파도를 뚫고 원하는 것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초보 연구생이라면 제 머릿속에서 튀어 오르는 의문들에 발목이 잡혀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힘이 다 빠져버리고 만다. 내 꼴이 그렇다. 그러니 어찌 그 긴 논문을 다 읽었겠는가. 양장되어 출판된 지도교수의 학위논문을 들고서 집으로 돌아가며 망망대해 위에 서 있는 환상을 느꼈다.


학위를 시작하기 2년 전부터도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글을 조금씩이나마 읽어 왔다. 이게 '알지도 못해서 생기는 자신감'이 생긴 원인 중 하나였을까. 그리고 늘 느끼는 바이지만 조금 알았다 싶으면 나의 세상이 축소가 된다. 집게손으로 축소시킨 나의 세상 밖으로 아득하게 넓은 숲이 드러난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너도 논문을 잘 쓰면 책으로 내보라는 말을 곱씹으며 지도교수와 나 사이에 놓인 격의 차이는 얼마나 될지 가늠해 본다. 그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로 치솟은 기둥을 보며 다시 천천히 한 발씩 위로 향하겠다는 다짐을 흘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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