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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Aug 25. 2023

전공 수업이 안 열린다고요?

지방 일반대학원의 현실적인 문제 1

OO아, 이번 학기에 진짜 열리는 수업이 이게 다야?


과사무실에서 조교로 근무 중인 후배에게 내가 물었다.


예 형, 이번 학기엔 문법 수업이 없어요.


이런! 이런 줄은 알고 시작했다지만 정말로 국어학 수업이 하나도 개설되지 않았을 줄이야. 3 차수의 수강 시간표에는 내가 전공하는 분야의 수업이 하나도 담을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는 제대로 돌아가는 대학원을 찾기 어렵다. 내가 모든 대학의 모든 학과 랩을 다 돌아다녀본 것이 아니니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람이 꼭 모든 걸 경험해야만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학교 생활을 하며 평일 저녁에 매주 며칠 씩 대학을 오갈 정도의 결심을 한 사람들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든 정상(?)은 아니다. 진리의 '끼리끼리'에 의해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꿈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의 동향을 묻곤 하는데,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인근 주변의 대학들 중에는 국립과 사립을 막론하고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대학원은 드물었다.


잠깐, 오해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대학원이라 함은 학술 목적의 일반대학원을 가리킨다. 교육대학원과 같이 자격을 발급하는 특수목적 대학원들은 여전히 호황이고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그러나 지루하게 논문을 읽고 그와 비슷한 글을 써내며 글더미 속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괴짜 같은 일반대학원은 인기가 없다. 그래서 그럴까, 얼마 없는 원생들 간에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눈물겨운 그 무언가가 있다.


사범대학의 대학원은 이런 경향이 특히 심하다. 그나마 교사들은 재직 중에 학위를 받으러 대학원으로 많이들 오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재교육 과정을 이수한다. 간혹 열심히 논문을 쓰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보통은 한두 학기를 더 다니고 학점으로 논문을 대체들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원생은 논문이지'라며 석사과정부터 책에 코를 박고 들어오는 케이스는 흔치 않다. 보통 이 정도의 각오라면 파견으로 교원대나 수도권 대학을 진학하거나 휴직계를 내고 새 길을 찾기 때문이다.


여하튼 장고 끝에 이런 특이한 집단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었다.


모교에서 학위를 시작하는 게 딱 하나 단점이 있어. 여기는 세부전공을 나눌 수가 없어서 원치 않는 수업을 들어야 할 거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보통 연구중심 대학들은 한 학과에 소속된 교수진이 방대하여 원생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에 따라서 상세하게 수업을 설계할 수 있다. 하다못해 인근의 거점대만 하더라도 국문과 안에 다시 국어학 전공과 국문학 전공이 나뉘어 자신이 원하는 계열의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방 대학(아마 이 문제는 수도권의 대학도 다수 해당되리라)에서는 학과에 소속된 교수진이 수많은 전공을 세분화시킬 만큼 충분치 못하다. 심지어, 같은 전공 안에서도 학파 간의 종류를 나누어보면 계파가 다양한데 이런 디테일한 요구까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대학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런 까닭에 나는 인지언어학을 전공하지만 전공명은 국어교육학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고전소설이나 교과교육론과 같이 국어교육학에 포함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함께 수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은 현재의 대학원이 가진 구조적인 특징이지 싶다. 이걸 한계라고 이름 붙이기도 적절하지 않은 게, 희망하는 분야만을 수강하겠다고 파고들기 시작하면 끝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원은 수업을 통해 공부하는 곳이 아니다. 파트타임 대학원생은 한 학기에 수업을 2개에서 많아봐야 3개를 듣는다. 퇴근 후 저녁에 눈을 비비며 듣는 두어 시간의 수업에서 얼마만큼의 깊은 깨달음을 얻겠는가. 수업은 마중물의 역할이고 나머지는 홀로 아침 시간을 쪼개든 주말 시간을 쪼개든 직접 책과 논문을 잡아 뜯으며 공부해야 한다. 드라이랩이 기본인 인문계열 대학원은 더욱 그러하다. 묻혀갈 수 있는 동료진이 없는 구조니 오롯이 스스로의 역량은 스스로가 높여야 한다. 혹자는 이 현실이 너무나 고독하여 학업을 중단하기도 한다. 인문 계열 대학원생이 갖는 고독함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따로 다루기로 하자.



여하튼 국어학, 더 나아가서는 언어학 수업이 없는 한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물론,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수업을 듣는 것이 마냥 시간낭비는 아니다. 작금을 통섭의 시대라고 부를 만큼 인접 분야와의 융합은 이해의 저변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값진 것들이 많다. 당장에는 1 차수 때 수강했던 고전소설의 정전에 관한 논쟁이 2 차수 때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계를 이해할 때 도움이 되었다. 비록 체계도, 논리도 다른 분야이지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생각의 흐름에는 비슷한 점이 있기 마련이라 이들 간의 시너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3 차수 강의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마중물을 맞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을, 점차 턱밑으로 다가오는 졸업논문의 압박과 함께 느낀다. 때로는 지나친 현실감보단 막연한 이상주의가 도움이 된다지.


덮어놓고 또 힘을 내볼 수밖에. 아직 낼 힘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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