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하나 내 삶에 당연한 건 없었다.
어쩌다 편도염에 걸렸다. 목이 아프다 싶었는데 점점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말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나는 영국에서 독한 감기가 걸릴 때면 병원에 가질 않는다. 왜냐하면 몇 번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5년 전 영국에서 처음으로 가정전문 클리닉을 방문하게 되었다. 영국은 개개인의 가정 전문의사가(General Practitioner: GP) 있고 아플 시 가정전문 클리닉을 먼저 가야 한다. 이 클리닉을 거치지 않고는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렸을 때 클리닉을 찾았는데 전문의가 항생제를 주지 않았다.(항생제는 약국에서 팔지 않는다.) 그저 집에 가서 꿀이랑 레몬 넣은 차를 만들어 먹으라는 말만 했다. 솔직히 기가 막혔다. 그런 말은 의사가 아닌 나라도 할 수 있는 소리니까. 그제서야, 남편도 열이 나면 병원보다 레몬차나 생강 차을 찾았던 그가 이해가 갔다. 몇 번이고 항생제를 못 받게 되면서 나도 터득하게 됐다. 감기엔 클리닉보다 레몬꿀차를 선택하라는 걸.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다른 차원의 통증이 찾아왔다. 양쪽 편도에 커다란 혹이 달렸는데 이게 위아래, 양옆으로 부풀어가면서 말 못 하는 걸 넘어서 침 삼킴마저 너무 고통스러웠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켰다. 조금만 참고 아침에 가정전문 클리닉을 방문하자고 결심했지만 끝내 삼켜지지 않은 침이 입술 옆으로 질질 흘러내리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파란 수건을 입으로 대고선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큰 병원(포스 벨리 왕립 병원) 응급실을 찾게 되었다. 새벽 5시 반, 어째 응급실의 대기실이 도서실로 착각할 만큼 조용했다. 소리를 낮추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중간중간 들릴 뿐이었다. 병원 절차를 밟고 간호사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할 때면 남편이 대답하다가 어떤 질문에 가서는 내가 흰 종이와 펜을 들고 적어야 의사전달이 가능했다. 그때만 해도 심하게 부은 편도가 목구멍까지 짓눌러서 콧구멍이 열려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하다고 생각했었다.
응급실 대기시간은 7시 30분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쪽 구석에 있는 TV를 쳐다봤는데 대기시간이 7시 30분이라고 무시무시한 빨간색으로 하이라이트가 쳐 있었다. 많이 기다려야 하니까 환자들을 위해 두배, 세배 불려서 만든 시간일 거야. 적어도 3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저렇게 적어놔야 환자들이 '휴. 7시간이 아니었어. 다행이네. 뭐.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위안을 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이 흘러도 빠져나가는 사람은 도통 보이질 않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만 계속 늘어나면서 대기실의 의자가 꽉꽉 찼다.
"이게 무슨 응급실이야? 여긴 통증을 최대한으로 길게 끌어내는 고문실이잖어!"
다섯 시간, 여섯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콧구멍이 열렸다는 감사는커녕 극심한 화가 화산처럼 치솟았다. '몸을 순식간에 녹일 만큼 끓어오르는 고통이 터져버렸는데 너네가 내 맘을 알아?' 고통에 취한 사람처럼 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지극히 고통스러웠고 며칠 째 통증으로 잠을 못 잔 터라 벽에 기대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침을 질질 흘리고 고개까지 떨구기를 반복했다. 여기 응급실에 있던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라 그렇게 조용했던 걸까? 다들 아플 텐데, 욕을 퍼붓거나 적어도 불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대기시간 7시간 10분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토록 불려지고 싶던 이름이었지만 좀비상태로 있던 나에게 내 이름이 귓구멍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남편이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리는 바람에 그제야 휘청이는 다리를 살살 일으키며 일어났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환자들이 빼곡하게 모든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빈 침대로 옮겨지자 간호사는 피검사와 항생제, 수액 주사를 놓기에 바빴다.
" 저도 편도염에 걸려봐서 알아요. 얼마나 아프던지 그 마음 너무 이해해요. 빨리 낫길 바라요."
" 이름이 헤이영 맞나요? 제가 맞게 발음했다면 좋겠네요. 많이 배고프실 텐데 제가 음식 주사로 쫙쫙 넣어드릴게요."
억수로 못생긴 얼굴만 하고 있던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 착한 친절은 이비인후과 병실에 입원해서도 이어졌다. 8인실 방이었는데 수프, 생선가스와 초콜릿 머핀에 아이스크림까지 풀 코스로 저녁이 나왔다. 이때쯤 되면 수많은 약물에 취해서 통증은 완화되었고 목구멍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음식을 넣을 수 있었다. 금세 싹 다 비워 버렸다. 다 먹고 수저를 내렸는데 차를 마실지 커피를 마실지 물어보았다.
내가 급하게 오느라 핸드폰 충전기가 없었는데 간호사가 스스럼없이 내 핸드폰을 충전해 주었다. 다행히 샴푸와 비누는 챙겼는데 그러면 뭐 하나. 수건을 빼먹어버린 걸. 샤워는 포기했는데 아침이 되자 조무사가 수건을 한 장 갖다 주었다.
"야식 있어요. 혹시 배가 고프면 나한테 말해요. 먹을 것 좀 갖다 드릴게요."
"장기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혈액순환을 위해 압박양말을 신으세요. 12시간만 신고 있으면 돼요. 여기 있어요."
어쩜 이렇게도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다정을 가진 천사들이 이곳에 다 모였을까. 7시간 10분 동안 징글징글하게 고문받았던 고문실에 대해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지난 일요일 새벽에 응급실에 도착했고 하룻밤만 병원에 입원한 후 그다음 날 오후에 기쁘게 퇴원을 했다. 근데 증상이 곧 심해져서 월요일 저녁 눈물을 머금고 고문실로 다시 끌려갔다. 그날은 6시간을 좀비처럼 기다렸다. 입원 후 첫 번째 저녁식사가 끝나고 파란 하늘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역시나 친절한 간호사가 손목에 꽂혀있던 주삿바늘을 그대로 두고 수액줄만 끊어 주어 가볍게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스코틀랜드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 병원 주위가 다 숲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이다. 병원 환경이 호텔 5성급과 막 먹는 거 같아서 걸으면서 병이 다 낫는 기분이었다.
그 어느 하나 내 삶에 당연한 건 없었다
파란 하늘이 보고 싶을 때 달그락달그락 바퀴가 굴러가는 수액걸이가 없고 누군가가 밀어줘야만 움직이는 휠체어도 없이 그냥 내 두 발이 마음 가는 대로 흙길을 밟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의자에 앉아 물통에 있는 물을 마실 때도 실실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당연했던 것들이 어저께만 해도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기적이었으니까.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물 마시듯 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일 초도 걸리지 않을 쉬울 일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1 초면 꿀꺽 마실 물뿐만 아니라 계속 올라오는 침조차 하루 종일 되도록 삼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보니 나에게 '물 마시듯 한다'라는 의미가 쓸쓸하도록 저려오는 건 어쩔수 없나 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서 과연 '쉽게 할 수 있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숨을 쉬고 눈 깜박거리고 고개를 올리고 책장을 넘기고 정말 그 어느 하나 당연한 건 없을 테니까.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라는 노래가 있다. 한 모금의 물이 간신히 목구멍을 지날 때마다 이 노래의 가사를 흥얼거렸다. 매일매일 나에게 주어진 기적들에 감사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