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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시 Sep 18. 2024

'아무거나'같은 소릴 하면 혼난다고요

<편의점 미숫가루 음료>

  

쓰삐융, 쓰삐융, 쓰삐융, 쓰삐이이이이- 매미가 우는 여름이면 생각나는 미숫가루.

미숫가루와 우유가 가득 담긴 통 마개를 꽉 닫아서 위아래로 흔들면, 챡챡챡- 곡물가루가 섞여 되직해진 액체가 묵직한 소리를 내고, 달그락달그락- 통 안에서 구르는 사각 얼음들이 유쾌한 리듬을 만들어 낸다. 흰색, 황토색, 모래색, 검은색. 볼펜으로 콕콕 찍은 점같이 작은 가루 알갱이들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뒤섞이며 자유롭게 부유한다. 뽕! 마개를 열면 확 풍기는 곡물가루의 꼬소한 향. 뒤따라온 설탕의 단내와 부드러운 우유 향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꿀떡꿀떡- 잘 섞인 음료를 들이켜면 입 안에 몰아치는 반가운 시원함. 치아 사이사이, 입안 구석구석, 더해서 목구멍까지 곡물가루들이 지나간 모든 공간에 남아 간질간질하게 흔적을 남기지만, 여름의 더위를 씻어주는 시원함에 입안에 남는 텁텁함 정도는 오히려 기꺼운 맛난 미숫가루.     


미숫가루라면 역시, 엄마가 타주는 '엄마표' 미숫가루가 제일이지만 독립하여 집을 나온 지금은 보통 카페에서 파는 것을 먹는다. 이제는 미숫가루가 웬만한 카페에서 다 파는 인기 음료가 되었기에 언제든 간편하게 주문할 수 있어서 즐겁다. 

벌컥벌컥, 시원한 미숫가루 한잔은 타임머신이 되어 나를 옛날의 어느 하루로 데려간다.      


    

미대 입시 재수생 신분이던 스무 살 여름, 치열한 한 주를 마치고 한숨 돌리는 금요일 밤이었다. 방학 특강이 끝나고 모든 학생이 귀가한 적막하고 쾨쾨한 미술학원에 나는 ‘삵선생’과 둘이 남아있었다.      


“편의점 좀 갔다 올 건데, 뭐 마실 거 사다 줄게. 뭐 마시고 싶어?”

“아무거나요.”     


지갑을 챙겨 나가던 삵선생이 하는 말에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강 답했다. 제자로서 혼나 마땅한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온유한 우리 삵선생은,     


“야아-, 너 ‘아무거나’ 같은 소리 하다 혼쭐난다? 진짜 어마어마한 ‘아무거나’ 사 올 거야. 너 그거 진짜 마셔야 해!”     


라고 장난스레 으르는 소리를 하며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 장단에 맞추느라 ‘네네~ 뭐 사 오시는지 기대하겠습니다’라고 배짱을 부렸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두고 보자’며 나갔고, 나 혼자 학원에 남았다.     


나는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그림 그리기에 너무 열중해서 제대로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 척했지만, 사실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던 것이었다. 선생님이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선 아예 자리를 빙빙 돌며 서성대느라 그림에 붓질 한번 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월요일엔 그림 합평이 계획되어 있었고, 원장선생님께서 오늘 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주말에 나와 마무리하라고 하셨지만, 주말엔 고향 친구가 놀러 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미술학원에 남아 금요일 밤새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아이, 진짜! 삵선생님은 왜 남은 거야! 혼자 집중해서 그리려고 했는데!’     


불편한데 좋고, 좋은데 난감하고, 난감한데 설레고, 설레는데 망했고. 복잡한 기분이었다. 왜냐면 나는 그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자, 주문하신 ‘아무거나’ 나왔습니다~”     


십여 분 뒤 삵선생이 가져온 것은 미숫가루 음료였다.     


“에게? 어마어마한 걸로 사 오신다고 하더니 너무 평범한데요?”

“아니, 편의점에 음료가 별로 다양하지 않더라고~ 아쉽게도 그게 제일 특이한 거였어.”     


아니 뭐, 어디서 양잿물이라도 구해오실 줄 알았지. 기대 이하의 결과물에 나는 겉으로는 코웃음 쳤지만, 속으론 혹여 긴장감에 음료를 코로 마실까 봐, 겁나서 바로 마시지는 못했다.     


밖에서 한 대 태우고 온 건지 삵선생에게서 멘솔 담배 특유의 시원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가 가까워지면 선생님이 뒤에서 내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아채곤 했다. 

초록색 마일드세븐 멘솔. 내게 음료를 사주고 삵선생이 본인의 몫으로 산 것은 담배였다.           


‘아 어쩌면, 오늘이 ‘그 얘기’를 할 수 있는 날인지도 몰라!‘     


이미 그림은 뒷전이 되어버린 나는 머릿속에 ‘선생님과 무슨 얘기를 해야 자연스러울까’하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사제 간에 가장 자연스러운 대화 주제는 대학과 성적이겠지만, 나는 전부터 그와 대화할 기회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그의 관심사들을 몰래 공부하고 있었다.     


삵선생은 좋아하는 것들이 아주 명확한 사람이었다. 

특히 담배와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담배를 중독 때문에 습관적으로 그냥 피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차(茶)를 대하듯이 향과 맛을 따져가며 즐긴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 담배를 검색해 보며 다양한 담배의 이름과 맛을 달달 외웠다. 어느 날 담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외운 것을 자랑처럼 늘어놓고 그의 관심과 감탄을 받고 싶어서.

그리고 종종 학원 수업이 끝난 늦은 밤 공원에 나가 길고양이들을 찾아다녔다.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사 온 간식을 억지로 들이밀다가 할큄 당하기도 했다. 이 역시 언젠가 삵선생에게 얘기할 에피소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가족 때문에 키울 수는 없다던 그가 틀림없이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이쪽에서 그림 그리고 있을게, 그냥 그림만 그리면 심심하니까 수다 떨면서 할까?”

“저... 저, 그러면.. 선생님 그.. 고, 고양..”

“음, 네 1 지망 대학이 홍대였지? 과는 어디 쓸 거라고 했지?”     


삵선생과의 대화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고양이의 ‘고’ 자도 담배의 ‘담’ 자도 꺼낼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고양이와 담배는 ‘내 이야기’가 아니기에 내 쪽에서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삵선생도 학생인 내게 희망 대학교와 학과, 성적, 진로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뭔가를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그가 나에 대해 그 외에 무엇을 알겠는가.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괜히 풀이 죽은 나는 삵선생이 사다 준 미숫가루 음료나 마셨다.     


그 맛은, 생각보단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진짜 미숫가루(집에서 직접 타 먹는 것)’보다는 한참 떨어지는 맛이었다. 미숫가루를 흉내 내는 ‘가짜’ 미숫가루 같은 느낌. 곡물 함유량이 적은 건지, 고소한 향도 약하고 맛도 밍밍했다. 그 덕에 목에 걸리는 까슬거림과 텁텁함은 거의 없었지만, 이 때문에 ‘가짜’ 미숫가루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단맛은 또 왜 이리 강한지, 미숫가루가 주인공이고 설탕이 조연이어야 맞는데 설탕물이 주인공이고 미숫가루는 들러리가 되어버렸다. 

적당히 달달하고 시원한, 애매하게 별로인 맛. 먹을 만하지만, 며칠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을 특색 없는 맛. 과연 ‘아무거나’ 다운 맛이었다. 


‘선생님께 맞춘 이야기 말고, 진짜 내 이야기는 뭐가 있지?’     


내 취향, 내 기호, 내 생각, 내 관점. 뭐가 있을까, 고민해 봐도 별반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달변인 선생님 덕분에 대화는 끊이지 않고 즐겁게 이어졌지만,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겨우 대답만 할 뿐, 밤새 단 한 번도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는 못했다.     


밤은 생각보다 금세 깊어갔다. 내가 상심했다고 시간이 나를 봐줄 리는 없었다. 기가 죽어 그림에 집중 못 하고 있다가, 뒤늦게 허겁지겁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창밖에 해가 드는 것이 느껴졌다. 다섯 시가 지나고부터는 그림 완성을 위해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나와 삵선생은 그림을 완성하고 학원을 나설 수 있었다.     


“알시야, 아침 사줄 테니 먹고 갈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

“응?”

“그냥 아무거나요.”     


뭔가 개성 있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없었던 개성이나 의견이 생기진 않는 법이니까. 나는 그냥 그런 성격이니까.          




주말 아침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열한 시 무렵, 나는 눈만 겨우 뜬 채로 배달어플을 켜 미숫가루를 주문한다. 음료가 도착할 때까지 침대에서 내내 뒹굴거리다가, 띵동-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에 미적미적 일어난다. 문 앞에 배달된,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1리터짜리 플라스틱 물병. 미숫가루 한 컵 가득 따라 꿀꺽꿀꺽 들이키며 잠을 쫓아내고, 아침 식사를 대신할 만큼 든든하기까지 한 미숫가루를 하루 동안 여러 컵에 나눠 마시며 느긋하게 남은 주말을 보낸다. 

이것이 요즘 내가 정착한 주말 루틴이다. 삵선생의 장난으로 ‘어쩌다’ 먹게 된 미숫가루 음료가 이제는 완전한 내 ‘취향’이 되었다.      


무색무취의 존재감 없던 나는, ‘아무거나’ 같은 개성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 오랜 콤플렉스였고,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도 대개 나와는 다른, ‘삵선생’ 같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뾰족뾰족한 장점과 개성이 있는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내 ‘특색 없음’이 그렇게 주눅 들고,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심각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며,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좋아하는’ 것들은 수없이 생겨나고 없어지곤 했다. 그중에 오래 살아남은 것들은 ‘취향’이 되고, 때로는 그것마저 이유 없이 소원해졌다가, 또 이유 없이 다시 좋아지기도 했다. 아마 어쩌면 ‘루틴’이 된 미숫가루마저도 언젠가 입도 안 댈 만큼 관심 밖이 되는 날도 올 수 있을 것이다.

'아무거나' 콤플렉스는 아마 짝사랑하는 상대의 기억에 남고 싶은 욕심에 생긴 조바심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마냥 웃기고 귀엽다.      


언제가 싫증 나게 될지도 모를 미숫가루를, 좋아하는 동안은 맘껏 마시고 즐기기로 했다. 누가 뭘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말해야지, ‘아무거나’ 말고, ‘미숫가루’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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