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던 일을 부르는 사람
[지난 에피소드]
거창하게 회사생활 시작이라고 말은 했지만 나의 고용형태는 어디까지나 '2개월 근무 조건의 단기 계약직' 이었다. 첫 출근날, 거대한 회색 건물 안 거대한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24살의 나. 아무도 맞아주는 이 없고 적막한 분위기에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어디 날 인도해 줄 사람 없나요...' 하며 약 30초 간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다가 만난 긴 웨이브 머리의 여성.
"어떤 것 때문에 오셨어요?"
"아... 저 사무보조로 오늘부터 출근하는 사람인데..."
"아! 이 쪽으로 오세요!"
그 대화를 시작으로 나의 H사 생활은 3개월 간 정신없이 흘러갔다. 2개월 계약이라면서 왜 3개월이 되었는지는 다음 문단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 두 책상 사이 길다란 반원 모양의 간이 책상에 앉았는데, 양 옆 책상 주인들에게 알차게 일을 배웠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타공을 하는 단순 업무부터 시작해서, 차츰 프로그램으로 전산 처리를 하거나 전화를 받는 일도 맡았다.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빨리 적응해서 폐를 끼치기 싫다는 마음이 몹시 큰 편인데... 그게 나의 일복이 되는 것 같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나고, 근무 기간을 더 연장할 수 있겠냐는 요청에 OK! 한 뒤 거의 준 직원처럼(?)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높으신 분의 높으신 분께서 갑자기 나를 단독 호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그 분에게 높으신 분들이 불려가 꾸중을 듣는 걸 몇 번 보았기 때문에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한건가 싶어 잔뜩 긴장한 채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난 일개 알바생(?)인데...!'
"다음 달에 우리 회사 분소가 생기는데 거기서 일해보지 않겠나?"
그러나 내가 들은 이야기는 아주 뜻밖이었다. 아는 것도 하나 없이 들어온 이 회사의 새로운 사무실에서, 그것도 정직원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니! 당시 나는 졸업도 하지 않은 휴학생이었고, 졸업한 뒤에는 취준 가시밭길이 펼쳐질 게 뻔했기에 몹시 솔깃한 제안이었다. 다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건,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가?' 였다.
업무량도 많고 복잡했지만 내가 이 회사에서 맡은 일은 그리 변화무쌍하진 않았다. 오히려 단조로운 편에 속했다. 배운 대로, 시킨 대로, 아는 대로, 착착착 수행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나는 이 일이 꽤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쉬웠다는 건 결코 아닌데, 그... 심장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부모님은 이게 어떤 기회인데, 일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지만 내게 적성이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퇴사일 기프티콘과 함께 받았던 모 과장님의 메시지. 더 좋은진 모르겠지만 더 좋아하는 업계로 가겠습니다...)
결국 복학을 핑계로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1개월 추가 연장 근무도 사양한 채 3개월 간의 회사생활을 마쳤다. 어디나 그렇듯 빌런은 있었지만 양 옆 두 책상에 앉은 두 여성과도 너무 친해졌고 (아직도 가끔 만난다) 일 잘하는 멋진 분들도 많있기에 아쉬움은 남았으나... 결국 내 꿈을 찾으러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후 코로나 때문에 임시 휴업을 했던 구 일터-카페-로 바로 다시 돌아가 알바를 했는데, 고작 3개월의 사회 경험이었지만 그 시간이 나에게 이상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게 분명했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학교 수업도 다 온라인인데
이 참에 자소서나 써 볼까?
계획은 없어도 추진력은 있던 당시의 나. 될 지 안 될지도 모르니 일단 시작해보자며 한줌인 스펙과 경험으로 마케팅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때는 몰랐다. 이것이 내 커리어의 시작이 될 줄은...
이제 와 생각해보니 첫 알바를 시작한 스무살의 5월부터 일을 안 한 기간이 도합 1년도 안 되는 것 같다. 일복이 터졌다고 해야 할지, 소처럼 일할 팔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 그렇게 살고 있다. 이쯤 되니 나 일복 있는 사람이오- 하고 얼굴에 쓰여 있는 건가 싶다. 혹시 일복도 관상에서 티가 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