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타 Apr 17. 2024

10만 원을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10만 원을 상대방과 나눠가지는데, 몇 대 몇으로 나눠가질지 비율을 제시할 수 있다. 상대방이 해당 제안에 동의하면 그 비율대로 나눠가지고, 거절하면 둘 다 못 받는다. 이 때 당신은 10만 원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라는 내용의 다큐를 우연히 봤다. 영상을 보다가 이런 흥미로운 질문이나 문제를 만나면 멈춰두고 답을 생각해 보곤 한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상대방이 6만 원, 내가 4만 원이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던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 같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내가 4만 원이라도 안정적으로 받으려면 상대방에게 6만 원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종류의 문제를 처음 접한 건 특목고 입시 때였다. 당시 문제의 의도는 논리적인 추론이었다. 편의상 최소 단위가 만 원이라 했을 때 나와 상대방이 모두 이상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내가 9만 원을 가지고 상대방이 만 원을 가지는 게 정답이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거절해서 한 푼도 못 받는 것보다 만 원이라도 받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이런 합리적인 추론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큐에서도 9:1로 나눈 경우 이론적으로는 못 받는 것보다 이득일지라도, 무시당하거나 공평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아서 차라리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대부분은 이를 고려해서 5:5로 나누는 걸 생각했을 것이다. 다큐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5:5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내가 상대방에게 오히려 만 원을 더 주는 이유는 거부권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5:5의 제안을 수락하겠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너가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값어치를 쳐줘야 한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그는 내가 제안한 5:5를 거부한 다음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거부권 소유자 여러분. 저는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5만 원을 희생하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상대의 달콤한 제안에 넘어가 잘못된 선례를 만드는 순간 우리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굴복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투쟁하여 우리의 권리를 지켜냅시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에 대해 했던 적이 있다. 원래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를 생각했었다가 막막해서, 곁에 있으면 좋겠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했었다. 내 결론은 전체 상황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나도 상대방도 잘못이 없는 걸 알고 있지만 누군가는 피해를 받아야 하는 상황일 때, 일단 나는 잘못이 없으니 피해를 받지 않겠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각보다 이런 상황은 종종 일어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조장하실 분?"이 있다. 수업을 듣는 누구도 조장을 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이 때 '내가 조장해야 하는 의무는 없으니 난 무조건 안 할 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조장이 되었을 때 수긍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 조장이 되었을 때 안도보다는 감사가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싶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큐에서는 두 번째로, 비슷하지만 다른 게임을 한다. 한 명이 10만 원을 어떻게 나눌 지 제안하는 건 똑같지만, 이번에는 상대방에게 거부권이 없다. 무조건 그대로 나누게 된다. 거부권에 대한 보상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 게임에서 돈을 나누는 입장에 되었다면, 어떻게 나눌지는 불 보듯 뻔하다. 자신의 권리를 챙기는 게 항상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이기적인 것과 자신을 돌보는 것은 한 끗 차이기에, 그 경계를 나누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느껴지는 팍팍함에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요즘 커뮤니티나 사회 뉴스를 보면 자신의 권리나 지위, 그리고 그에 따른 자격이나 보상에 매몰된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내가 OO인데 OO는 받아야지 라던가, 혹은 반대로 너가 OO면 OO 해야지 하는 식의 주장들. 한치의 양보나 타협도 없이 끝없이 대립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하기에,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한다.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한다. 두 사람의 스펙을 적어두고 '누가 더 나음?' 혹은 '누가 더 아까움?'하는 식의 글들이 항상 인기가 불타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들은 왜 지위와 그에 따른 보상에 집중할까. 어쩌면 선택의 자유가 그 원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혼, 딩크, 욜로, 파이어 등등. 과거에 비해 정말 다양한 삶의 방식이 나타났다. 비단 삶의 방식 뿐만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점점 더 많은 선택지들이 생기고 있다. 옳고 그름을 가르라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다양한 선택지들이 존중받는 게 옳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이런 선택의 자유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만 할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동등하다고 여겨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나기에, 신분제의 폐지와 모두 평등하다는 가치관이 사람들을 더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했다. 다양한 선택지가 열린다는 건 비교할 후보가 늘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갈림길에서 다른 수많은 후보를 제치고 결정을 내린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불안에 빠질 것이다. 그동안 했던 수많은 선택들과 그 결과로 존재하는 지금의 나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잘못 표출되어 지위와 보상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주장처럼, 때로는 올바름이 항상 인류의 행복으로 귀결되진 않을 수 있다. 자유는 우리에게 여유를 뺏어갔다. 밀려드는 선택지들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든다. 이다나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 시간 가성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시간은 부족하고 해야 할 것은 많기 때문에 최소 노력으로 최대의 보상을 받으려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감상'과 '소비'를 구분한다. 행위 자체가 목적인 경우엔 감상이고, 다른 실리적인 목적이 수반되는 경우 소비라고 한다. 소비는 행위에 목적이 없기 때문에 가성비를 최적화 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알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빨리 감기로 보게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인생 작을 찾는 것보단, 검증된 작품을 추천받는 것을 선호한다.


최근에 북토크에 관심이 생겨서, 북토크를 종종 다니시는 작가님께 북토크는 어떻게 찾는지 여쭤봤던 게 생각났다. 질문을 보내면서 개발자의 관점으로, 북토크 정보들을 모으고 신청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분들의 참여는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북토크를 열 장소를 찾는 작가분들께 이벤트를 열고 싶은 독립서점을 연결해 주는 생태계도 구축하면 서로 상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답장이 왔다. 북토크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알려주시면서, 품이 많이 들지만 좋아하고 진심인 분야이기에 그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하셨다. 어쩌면 나는, 북토크를 소비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내 계획대로 플랫폼이 구축이 되고 잘 돌아갔다면 수많은 북토크 목록에 파묻혀 어떤 걸 가야할 지 비교하면서 하나하나 당위성을 부여하려 했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렇게 골라서 갔을 때 생각보다 실망했다면, 괜히 탈락했던 다른 북토크들이 떠올랐을 것 같다. 가성비를 따지지 않고 탐색하는 과정 자체도 즐길 때 비로소 결과와 상관없이 그 경험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소비에 가까울까 감상에 가까울까. 요즘 여유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항상 최선의 선택만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경제학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그로 인해 포기되는 가치를 의미하는 기회비용이라는 용어가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기회비용을 고려하는 게 맞지만, 위의 게임에서 9:1로 나누면 거절당한다는 것을 통해 어차피 세상은 합리적으로만 돌아가진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기회비용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 지출해서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의미하는 매몰비용이라는 용어도 있는데, 매몰비용에도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과거를 비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최선의 결과인지에 매달리기보단 그 선택 자체를 깊게 경험해 보면 어떨까. 충분히 고민하여 스스로의 선택을 자부할 수 있다면 그 뒤의 과정은 결과와 상관없이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