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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관식이

- 인생 드라마가 된 "폭싹 속았수다"-

by 고들정희

"흐릿하게 살라고 강요하던 세상에서 누구보다 선명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 모든 애순이들과, 세상 곳곳에 뚝심 있게 자기의 욕심을 심고 길러낸 모든 금명이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얼마 전 청룡영화제에서 "폭싹 속았수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아이유의 수상소감이 화제가 되었다.



제주에서 태어난 요망진 반항아 애순이와 팔불출 무쇠 관식이의 이야기는 올봄 전 국민을 울렸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손에 꼽는 인생드라마로 기억하게 되었다.

평소 유명한 드라마를 일일이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너무 좋아했던 "나의 아저씨"의 감독과 "동백꽃 필 무렵"의 작가가 함께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볼 결심을 했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이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16부작이 끝날 때까지 눈물 콧물을 얼마나 쏟아냈는지 모르겠다. 슬픈 이야기라기보다, 어딘가에 실제로 있을 법한 애순이와 관식이의 삶이 매 회마다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관식이의 사랑이 자꾸 마음에 쓰였다. 관식이에게서 내 남편이 보였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관식이의 모습에 자신의 남편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내 남편은 관식이처럼 나만 바라보는 사람이다.

평소 나를 챙겨주는 말투나 애정이 참 고맙다. 언제나 내 물건을 고를 땐 "제일 좋은 걸로 사라"고 말해준다. 장을 보다가도 "자기 머릿결이 좋아지려면 이거 써야 하나?"라며 처음 보는 샴푸를 만지작 거리는 사람이다. 며칠 전 내가 "머리가 많이 상했다"고 했던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고 기억해 챙겨주는 것이다.

또 내가 "내 나이엔 이런 게 좋다더라"라고 하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럼, 하나 사"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신혼 때는 너무 칭찬만 하는 남편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부끼리 티격태격 디스전을 펼치는 커플들이 오히려 즐겁게 사는 것 같고 부럽기도 했다.

내가 옷을 입고 "좀 봐달라"고 하면, 남편은 늘 "나한테는 그런 거 물으면 안 되지~ 내 눈엔 다 예쁜데"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이니, 나는 "뭐야~ 제대로 좀 봐줘~"라며 투정을 부렸다.

게다가, 내가 아프거나, 다치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가 많아지고, 주의 사항을 끝없이 알려준다. 나는 그런 애정 어린 걱정조차 듣기 싫어하고 귀찮아할 때가 있었다.

남편에게 늘 사랑을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소중함을 잊었던 것 같다.


내 옆에는 늘 관식이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애순이가 아니었다.


드라마 속 애순이는 관식이가 사기를 당했을 때도 화 한번 내지 않고, "괜찮아,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라며 그의 마음을 지켜준다. "개구리도 멀리 뛰기 전에 움츠리는 거잖아" 하며 남편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 한다.


애순이가 관식에게 자주 해주던 말이 있다.


"나 너무 좋아~"


사소한 일에도 관식이가 해주는 모든 일을 좋아하며, 가슴을 부여잡고 감동한다. 여자인 내가 봐도 참 사랑스러웠다. 나는 평소 남편이 나를 위해 무언가 해줘도 크게 감동하거나 "고마워", "나 너무 좋아" 같은 말을 잘하지 못 하는 편이었다. 무뚝뚝하게 툭툭 던지는 말투, 매번 정확하고 예리하게 꽂는 화법에 남편은 힘들었을 것이다. 드라마를 보며 그런 사실이 마음에 미안함으로 남았다.


마지막에 관식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나는 남편을 떠올리며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관식이가 홀로 남겨졌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드라마 속 관식이는 혼자 남을 애순이를 위해 높은 찬장의 물건들을 아래로 옮겨 놓고, 집안 곳곳을 손 봐두며, 딸 금명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아빠한테 엄마는 진짜 귀한 사람이니 답답해하지 말고, 짜증 내지 말고 다정하게 대해 줘"


그 장면에서 가장 많이 남편이 떠올랐고, 참 많이 울컥했다.

"나 너무 좋아~"처럼 애교는 잘 못 부리더라도 남편의 착한 마음 씀씀이를 더 잘 알아봐 주고 싶다. 그의 기가 팍팍 살아나도록, 관식이에게 애순이가 해줬던 말들을 더 많이 해주고 싶다.


도동여고 일의 오 오애순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궁금하고,

내가 뭐라면 괜찮고,

남이 뭐라면 화나고,

눈 뜨면 안 보는 척

눈 감으면 아삼삼


만날 보는 바당 같아 몰랐다가도

안 보이면 천지에 나 혼자 같은 것


입안에 몰래 둔 알사탕처럼

천지에 단물이 들어가는 것


그게 그건가

그게 그건가


그래서 내 맘이

만날 봄인가


내 옆에 늘 관식이가 있었지만, 내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람..

그걸 깨닫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나 보다.

"당신을 만나 고생은 했을지언정 외로웠던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애순이가 했던 이 말 처럼, 나도 남편 덕에 단 하루도 외롭지 않았다. 늘 마음이 풍족했고, 세상을 다 가진 여자 같았다. 내 옆에 있던 사람을 다시 보게 된 하루.


오늘은 왠지 팔불출.. 아니, "남불출"이 되어 남편 자랑을 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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