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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by 고들정희

매년 8월 이맘때가 되면 아버지 기일이 돌아온다.

3년 전, 갑자기 쓰러지신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코비드 시기라 가족면회조차도 허락되지 않던 때, 낯선 요양원에서 아버지는 계속 집으로 가고 싶다고 외치셨다는데,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먹먹하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부리나케 한국으로 가서 장례식을 치렀다. 늦었지만 마지막 날의 발인은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버지를 바다에 뿌려드리고 돌아온 며칠 뒤, 엄마는 아버지의 물건 정리를 시작하셨다. 처음엔 뭐가 그리 급하실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있는 동안 도와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고 해봤자 평생을 즐겨 보시던 신문더미들, 좋아하시던 바둑 스크랩, 낡은 종이 메모들, 손자들오면 꺼내 주시던 사탕 상자들, 그리고 옷장 가득한 양복들과 줄무늬 남방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옷 정리가 제일 먼저였다. 다락방에는 아버지가 입지도 않는 오래된 양복들이 그대로 켜켜히 걸려 있었다. 상태는 말끔했지만 유행이 지나, 이제 누군가 물려 입을 수도 없는 옷들이었다. 안방 옷장에는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은 스트라이프 남방들이 빼곡히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정리대상이었다. 평소 검소하신 엄마는 아버지를 늘 '영국 신사'라고 놀리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다지 돈욕심이 없으시고, 경제력도 없으셨지만, 잠깐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양복바지에는 늘 칼주름을 세우시고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가셨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양복 입은 사진을 보면 키도 크고 날씬하셔서 정말 영국신사처럼 멋지셨다.

엄마는 차곡차곡 검은 봉투에 아버지 옷들을 담으셨다. 거실 한가득 아버지 옷 봉투가 쌓였다. 아버지 본인의 물건이라고 해봤자 값어치 있는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옷들도 결국 옷수거하는 곳에서 싼값에 가져가겠지..

옷 이외에도 아버지는 버리는 걸 잘 못하셨다. 안방 협탁에는 언제 적 것인지도 모를 신문들이 쌓여있었다. 평소에도 이거 좀 버리자고 하면, 다 중요한 거다, 보는 거다 하시며 손도 못 대게 하셨다.

그 협탁을 이제야 정리하네 하면서 엄마랑 웃었다.

협탁 속 서랍에는 아버지의 가계부가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 꼼꼼하게 손으로 가계부를 쓰셨다. 그 노트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수십년이나 됨직한 오래된 가계부에는 연도, 날짜와 함께 콩나물 얼마, 두부 얼마, 정희 용돈, 학원비 얼마까지 다 적혀 있었다. 우리가 먹던 식단 메뉴까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가족의 산 역사였다. 가계부를 펼치며 "이런 건 데이터 기록용으로 박물관에 보관해도 되겠다" 며 웃었다.

아버지는 글씨체가 유려하고 한자에도 능숙해 제사 비문은 늘 직접 쓰셨다. 그런 글씨체로 대단한 곳도 아닌 가계부에다 재능을 낭비하셨어하면서 웃다가 가계부 속에 끼워진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언니가 대학교 1학년때 아버지에게 쓴 메모로, 언니가 겨울 외투를 하나 사야하며,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가 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그걸 여태 보관하고 계셨다니.. 언니의 당시 순수했던 메모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글씨체와 기록을 읽어보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순간일 수가..


그때 문득 느끼게 된 게 있었다.

내가 떠날때는 남겨둘 물건은 되도록이면 적게, 기록은 많이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면서 지니고 아꼈던 물건들이라도 결국엔 떠나고 나면 남은 사람들에게 처치 곤란인 셈이다.

그러니, 정말 소중한 것만 지니는 습관을 들이고, 그 물건들을 평소 잘 정리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남은 사람들에게 짐이 될 물건보다, 마음을 나눌 기록들을 더 남기고 싶다.

언젠가 나의 지인들과 가족들이 내가 생각날때 내 글을 펼쳐 읽으며 웃거나 눈물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 지구별에 잘 살다 갔다는 흔적하나 남긴 셈이 되지 않을까.

<제일 오른쪽에 환하게 웃고 계신 분이 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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