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산, 제임스 터렐 관
무상하게 빛을 들여다보는 일을 좋아하지만, 내 눈앞의 빛에만 관심이 있어 다른 이가 만들어낸 빛을 찾아가 보겠다는 욕구를 가지지 않았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열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테다. 그래서 이제야 가 본 뮤지엄 산의 제임스 터렐 관.
자꾸만 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여름에 어울리는 경험이었다. 아마 내가 겪은 가장 신비한 빛과 색의 경험으로 남지 않을까. 존재한다는 말을 붙이기가 이상하리만큼 당연하게 여겨지던 자연의 빛과 부차적 요소였던 인공의 빛은 제임스 터렐의 작품에서 주제가 된다. 간단하고 쉬운 작업이라 평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을 감상하면 위해 작가가 얼마나 다양한 시각의 고민을 거쳤는지 느낄 수 있다.
뮤지엄 산에서 전시 중인 제임스 터렐의 작품들 중 간츠펠트(Ganzfeld)에 마음을 빼앗겼다. 독일어로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작품은 간단하고 당연하게도 여겨지던 빛과 색을 통해 나의 존재를 사유하게 만든다. 계단을 올라 작품의 안으로 들어가 걸으며 감상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내가 들어갔던 안을 들여다보고 걸으며 발자국마다 수많은 생각이 담겼다. 까만 계단을 오를 때는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듯했다. 그 공간에서는 기본적인 물리 법칙마저 다를 게 작용할 것만 같았다.
작품의 안에서 바라본 밖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안에서 비치는 색에 따른 착시로 인해 밖은 안의 보색으로 보였다. 밖은 특별한 색 없이 조도만 조절되는 공간이었는데, 안의 색에 따라 다르게 보인 것이다. 작품 안의 색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님에도, 목격하는 풍경이 그 색에 의해 달라졌다. 나는 의도하지 않은 것인데, 주변 혹은 타인의 영향으로 내가 보는 세상이 달라진다는 은유 같았다.
작품의 안은 무한하게 느껴졌다. 감상적인 비유의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다른 것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무한하다는 비유일까. 안의 빛에 따라 밖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것과 그것이 착시라는 사실 때문에 결국 내가 사랑하는 빛과 색의 모습도 결국 모두 환상이었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 무한함에 압도되어 내 생각이 망가지기 전에 다시 작품의 밖으로 나가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한을 빠져나와 계단을 오르내리고, 전시 공간을 걸으며 안을 마주했다. 내가 서 있는 곳에 따라 그 안이 입체적인 공간으로 보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평면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편협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타인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타인이 어떤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든 우리는 내가 선택한 나의 위치에서 타인의 안을 바라본다. 나는 밖에 불과해서 그의 안이 평면인지, 무한한지, 낭떠러지를 숨기고 있는지 쉬이 알 수 없다. 요리조리 조심히 발을 옮기며 상대의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이해한다면, 그 낭떠러지가 끝의 절벽이 아닌 낭떠러지를 가졌음에도 무한히 끌어안는 깊은 포옹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과 감상도 그저 나의 시각에서 해석한 착시이자 환상이라면? 결국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지 못하는, 과학만이 설명할 수 있는 '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빛과 색을 사랑하는 일을 경계해야 할까. 이유 없이 무조건으로 빛과 색에 경탄과 경의를 품고 있던 나의 시각을 의심해야 할까. 그저 모두 착각이고 환상이었을까 고민했다. 미술관을 나오며 여전히 빛과 색에 발이 붙잡혀 물의 바닥을 찍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