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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Apr 03. 2024

알 수 없는 일

4월 3일. 한 해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내 속도와 분기로는 시작점이 맞다. 글 쓸 때도 드라마 극본과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이 연초라 한 해 전 연말부터 이어서 준비를 해야 했고, 다 마치고 나면 얼추 3월 즈음이었다. 새해를 계획하고 생각을 정리하면 3월 중순 쯤 진정한 새해를 맞이하곤 했다. 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해왔기 때문에 새 학기가 새해로 인식되는 것인지도. 뭐 물론 아이들은 예비 학년이라는 이름을 달고 12월 내지는 1월부터 그 해의 공부를 시작했지만.


느린 것에 대한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2월, 내가 하던 논술 프로그램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른 제의를 받았었다. 교재 개발팀으로 출근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곳에서 초등 문해력 교재를 만들고자 하는데 학원에서 나를 추천했고, 그쪽에서 수락했다는 것. 재작년에 구직할 때 교재 개발 쪽으로도 알아봤으나 서류전형 조차 통과하지 못한 경험이 있는 터라 운명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연봉을 낮추고 가야하긴 했지만, 강사 경력만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4월부터 출근. 그러니까 오늘로 출근 3일차다. 계속 다니기로 했다면.


출근 첫날 정신 없다기 보다는 지루하게 흘러가는 하루 일과 중 가장 자극적인 순간이 계약서를 봤을 때다. 연봉의 대략적 범위만 듣고 출근을 했는데, 그것보다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실수령액으로 따지만 내 작년 연봉보다 월급이 100만원 줄어든, 2018년의 내 강사 수입 정도이기도 했다. 당황해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이거 최저 임금 아닌가요?"


인사팀 직원은 최저임금보다는 좀 많다고 했지만, 실수령액으로 따지만 최저임금의 딱 그 금액이다. 거기서 사대보험 떼고 받는 임금 노동자의 기준으론 최저임금이 아니긴 하다. 아무튼 아무리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입사한 것이지만 턱없이 적은 금액, 그것도 애초에 들었던 임금 선보다도 적은 금액의 계약서에 싸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연봉 책정자인 팀장과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서로의 착오를 인정하고, 논의하고, 각자 입장을 공유하는 자리에서 내가 느낀 것은 아... 이 사람이 보기에 나는 그냥 평범한 신입이구나, 였다. 애초에 강사로서의 내 노하우를 써야하는 작업이라 채용된 줄 알았다. 그래서 경력 증명서도 최대한 준비해서 제출했었다. 그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고, 의미 없는 수고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착오인지 알고자 한다면 따져봐야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보였다. 팀장은 미안한듯이 내가 기대하는 연봉과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연봉 사이 금액을 내게 말했지만...


애매했다. 무엇보다 내키지 않아졌다고 해야할까? 한번 낮춘 연봉을 회복할 있을 만한 기대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 회사에 기대했던 어떤 비전 같은 것도 사라졌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팀장은 프리랜서로 일은 함께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본인이 연봉을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은 탓도 있으니 그렇게 책임을 지려는 모양새였다. 나도 당장 직장을 다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는 나를 추천한 상사에게 상황을 말씀드렸다. 또한 내가 신입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 알아봐주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게 왜 그 분 탓일까 싶었다. 급여 같은 건 애초에 잘 알아보고 일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사람끼리의 일이니 아무리 연봉 깎고 들어가는 이직 자리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하한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입장 바꿔 본인이라면 어떨까만 생각해도 쉽게 알 법하지 않나. 그런 인지상정을 믿은 내가 너무 순진했나 싶기도 하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에 정신이 혼미하다. 그곳에 남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책임감으로 프리랜서 일을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지 않은 것도 잘한 거... 맞나?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운명의 작용 같은 것이 있는 건가 싶은 순간이 있었다. 보조작가를 하던 그 무렵인데... 하던 작품이 엎어지고 나자 허무해져, 이만 고향으로 내려갈까 했을 때. 가만 있는데 주변에서 보조작가 계속 하냐며, 자리가 있는데 해보겠다며 연락이 왔다. 그렇게 시작했던 보조작가 일은 모두 3개월만에 내가 그만두거나 작품이 엎어졌다.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제안에 무엇인가 나를 이곳에 붙잡아두려 하는 것이 아닐까 막연한 생각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이번엔 단 이틀.


의외의 것들이 밀려올 때 휩쓸려가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될 것 같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오늘, 내일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이미지 출처 : 사진: UnsplashEfe Kurn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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