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여의도 근처로 이사를 와버렸다. 내가 사는 곳에서 도보로만 통행할 수 있는 샛강다리를 넘으면 여의도다. 여의도의 왠만한 곳은 도보로 다닌다. 여의도 내 목적지가 도보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여서도 있지만, 버스를 타봤자 아낄 수 있는 시간이 10분 남짓이라 버스비가 아까워서도 있다. 한 시간 이내면 운동삼아도 걷는 거리이니 그냥 겸사겸사 걷는다.
샛강 다리 위해서 보이는 여의도
여의도는 서울 내에서 그나마 내가 동서남북 분간을 하는 곳이다. 지도 앱을 슬쩍 보고 주욱 걸어가면 원하는 목적지 정도는 찾을 수 있는, 그나마 익숙한 장소이다. 14년 전 드라마 작가가 되어보겠다고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다녔고, 보조작가 할 때도 작업실이 여의도인 경우가 몇번 있었다. 덕분에 여의도의 오래된 맛집도 조금은 알고 있다. 사실 작가님이 이끄는 대로 주관 없이 따라갔기 때문에 요즘 기억을 되살려 더듬더듬 찾아보는 정도다. 덧붙여 국회도서관은 드라마 쓸 때 자료조사를 위해서 자주 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이사 온 것이 여의도 옆이라서는 아니다. 직장 때문이었는데, 직장은 이틀만에 관둬서 여의도를 자주 가게 되었다.
월요일에 종종 국회도서관을 찾는다. 더 가까운 곳에 있는 도서관이 문을 닫는 요일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국회도서관에서 컴퓨터로 열람 가능한 논문이나 단행본 같은 것들을 보았다. 절판된 단행본이 그곳에 있는 경우도 많아서 느긋하게 시간을 내서 훑어보고 왕창 복사해서 집에서 검토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봉을 올려보고자 공부를 하거나 읽으려고 사둔 책을 읽기 위해서, 말하자면 '독서실'같은 용도로 국회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다.
국회도서관이 국회 옆에 있다보니 그곳을 자주 지난다. 으레 시위하는 사람이나 주장을 담은 푯말같은 것들이 있고, 경찰이 늘 지키고 있다. 각 정당의 현수막도 보이는데, 얼마전 노회찬 의원 6주기 추모 주간임을 알리는 현수막을 보았다.
노회찬 의원 6주기 추모 주간 현수막
국회의사당 앞 마당에서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을 하던 날도 지금처럼 무더웠다. 7월 한참 하반기 드라마 공모전 마감 주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노회찬 의원의 서거 소식을 듣고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곧바로 알지 못했다. 자초지종을 보고 나서야 이대로 있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기한을 넘기면 올해엔 더이상 공모가 남아있지 않았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자료조사가 더 필요하니 겸사겸사 국회로 가자.' 그렇게 생각했다. 거의 마무리해야 할 시기인데 왜 자료조사를 더 하려했는지는 모르겠다.
검은색 여름 옷이 없어서 회색 원피스에 검은색 셔츠를 자켓처럼 걸쳐입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도착이 늦어져서 이미 영결식은 진행중이었다. 멀리서 이젠 은퇴한 심상정 전 국회의원의 울음 섞인 추도사가 들렸다. 국회 직원과 시민들이 마당에 모여 서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여름의 한가운데였음에도 그분의 마지막을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서있었다.
이윽고 노회찬 의원의 조카가 추도사를 했다. 그중 기억나는 내용이 하나 있다. 노회찬 의원이 조카에게 했다는 조언,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 목숨을 끊기로 한 노회찬 의원의 선택이 코너에 몰려서 도망치듯한 것이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마지막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럼에도 왜 그 길을 택했을까. 그것이 자신이 몸담은 정의당을 위해서였는지, 노동계의 미래를 위해서였는지 알 수 없다. 정의당의 지금의 상태를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플 뿐이다.
국회 도서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5층 정기간행물실이다. 파일로 열람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서나 볼 수 있으니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학술 기사를 보게되는 경우도 많아서 5층에 자주 가다보니 익숙하기도 하고, 국회도서관과 그 뒤편 한강 다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좋아서 종종 가는 곳이다. 창가 쪽으로 1인용 테이블이 주욱 늘어서 있는 것도 매력이다. 요즘도 시간을 넉넉할게 쓸 수 있는 날이면 5층으로 간다. 오후라 석양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서향이라 햇볕에 눈이 좀 부시긴 하지만.
며칠 전 혼자서 5층 창가 자리에 앉아 극본을 쓰는 사람을 보았다. 문단의 형태가 일정하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시나리오 혹은 방송 극본을 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다니던 때에 국회도서관에서 작업하는 작가지망생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다. 구내식당 밥이 맛있다는 이야기도 그때 처음 들었다.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경기도에 살았기 때문에 국회도서관까지 가서 습작을 하진 않았다.
그날 거기서 본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다.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을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수업을 듣는 상태인지, 공모전을 준비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아니면 당선자 신분의 인턴 작가인지,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다르겠지만 치열한 그 드라마계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함'만은 같을 것이다.
2년 전까지는 나도 그랬다.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교육생이었던 적도 있고, 쉴새 없이 공모전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던 적도 있다. 아쉽게도 방송사 공모전 당선자가 된 적은 없지만, 경기영상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작은 작가 지원 공모에 선정되어 당선자의 혜택을 받기도 했었다.
경기영상위원회로부터 지원 받았던 작업실 작업 중인 모습
요즘 국회의사당 근처를 지나면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보조작가하던 시절도 있지만, 교육원에 다녔던 때의 기억. 부산에 살면서 서울로 수업을 들으러 다니던 때의 기억들이다. 연수반에서 전문반으로 올라갈 때 한번 탈락한 적이 있다. 탈락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이 있어서인지 서울에 왔을 때 국회의사당 앞까지 갔었다.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이 있는 곳 근처에 KBS방송국 본관과 신관이 있는데, 나는 굳이 그곳까지 가서 방송국 사진을 찍었었다. 무슨 각오라도 다지려는 듯이.
굳이 찾아가서 찍었던 KBS 건물 사진
결국 이후 작품 심사를 통해서 전문반을 다시 갔다. 그땐 그게 무슨 인정을 받은 듯이 기뻤다. 그러고 보면 작은 작가지원공모에 선정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누군가의 작은 인정에 들떴던 당시의 내가 아주 귀엽게만 느껴진다.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 길을 걸으며 내가 찾으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히트 작가의 수억대의 원고료가 탐이 났거나, 얼굴을 알려 세상에 나를 내보이고 싶은 욕심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열심히 썼다. 매일 쉬지 않고, 나를 들여다볼 새도 없이, 쉬지 않고 긴 시간 쓰다보니 그 시간이 내게 새겨져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나'라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넘침과 모자람, 이 모든 것이 그 시간과 관련한 선택과 노력에서 비롯되었음을 느낀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국회의사당 5층에서 극본을 쓰던 그 사람을 보니 지난 1년반 동안 죽어도 떠올리지 않으려던 그 말을 스스로 뱉을 수 있었다. 작가가 되고자 한 선택에 대한 후회인지, 멈추어버린 것에 대한 후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요즘 하는 모든 것의 이유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이 끝난 후 나는 국회도서관 5층 창가자리에 앉았다. 필요한 자료를 찾아서 보다가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영결식에 참석하고나면 그 죽음에 대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자료를 끝까지 보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작품을 쓰고 있었는지는 찾아봐야 알겠지만, 어쨌거나 마감은 끝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어떻게든. 그때 나는 그렇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