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랜 Apr 23. 2023

저희가 작가님의 명함을 만들어 드렸어요

방황의 흔적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 수강생, 드라마 보조작가, 작가 지망생, 선정작가, 입주작가 등. 12년간 드라마 영화 극본을 쓰면서 내 앞에 붙었던 수식어들이다. 그 모든 수식어를 내려놓고 취업을 했다. 글을 쓰며 꾸준히 강의를 해왔기 때문에 그 경력으로 내가 원하는 수입과 근무 조건의 일자리를 찾았고 현재 두 달째 근무하고 있다.     


평범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일은 하기 싫은데 일하는 티는 내고 싶은, 쉽게 사는 것이 목표인 듯 행동하는 동료 때문에 미치겠다. 이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나를 지키며 조직에 적응하는 일인지도 고민이다. 실적이 기대 만큼 좋지 않은 부분에 대한 고민도 있다. 상사의 눈치도 종종 보인다.     


그러면서도 일면 작년 1년간 썼던 16부작 미니시리즈와 영화로도 각색해둔 2부작 드라마를 공모전에 내보는 중이다.




연락을 하나 받게 되었다. 작년에 당선되었던 아주 작은 공모전 주최 측에서 비즈니스 미팅을 한다는 것이다. 재작년에도 같은 곳에 당선되어 작년 비즈니스미팅에 참석했었다.(아주 작은 공모전이기에 2년 연속 당선이 가능하다) 세 곳과 미팅했지만 좋은 결과는 없었다.     


그래서 큰 기대는 없으나 혹시 모를 기회가 될 수 있는 자리라 신청은 했다. 제작사나 출판사가 작품을 보고 내게 미팅을 신청해야 기회가 생기는 거지만. (미팅 신청자가 없으면 행사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취업한 회사다. 강사라는 직업 특성상 연차나 월차를 쓸 수 없지만 오전에 시간이 널널하다. 그래서 미팅 가능한 시간대를 주최 측에 말하고 그때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미팅 신청이 아무도 없으면 어쩔 수 없죠 뭐.”     


그러면서도 내심 적어도 한두 건 정도는 미팅 신청이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미팅 전날 문자를 받았다.      


이번 오프라인 비즈니스 미팅에 미팅 신청이 들어오지 않았음을 안내드립니다.


정말로 이번엔 0건인가? 당황스러웠다. 운명이 혹은 운이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결과로 알려주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니 단념하라고. 현실에 감사하라고 꿈같은 건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인가.     


문자엔 이와 관련한 안내가 있어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미팅 신청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무슨 안내 사항이 있다고 연락을 한다는 건가 싶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예상되어 그냥 잊었다. 그런 것까진 신경쓰기엔 요즘 내 일상도 꽤 바쁜 상태라.     


이틀 뒤 연락이 왔다. 주최 측 직원의 번호를 저장해두지 않아서 그냥 휴대폰 번호가 뜬 것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 회사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내 이름 뒤에 ‘작가’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사무실을 나왔다. 전화 건 직원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작가님 명함을 만들어 드렸어요.”     





미팅 때 제작사나 출판사에 건네라며 만들어준 명함인 모양이다. 미팅 신청이 들어왔다면 행사장에 가서 수령 후 썼어야 하는 명함이테지. 작년 행사 땐 이런 게 없었는데 하필 왜 이런 상황에...


당황했다. 극본 쓰기를 그만두고 취업까지 한 내가 그 명함을 쓸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직원은 내게 명함과 행사 기념품을 보내겠다며 주소를 달라고 했다. 나는 망설였으나 결국엔 문자로 주소를 보냈다.     


강사로서는 8년차다. 주로 아르바이트 형식의 파트타임 강사였지만, 경력상으로 그렇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동안 어디서도 내게 명함을 만들어 준 적은 없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직률이 많아서 그런지, 악덕원장이 이야기하듯 대부분 법적으론 개인사업자라 그런건지.


작가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드라마 보조작가를 하던 시절 취재를 나갔던 곳 취재원 분께서 왜 명함 같은 건 가지고 다니지 않느냐고 물어서 사비로 메일주소와 연락처 정도가 쓰인 명함을 만든 적은 있다. 그러니 이번에 그들이 보내주겠다는 명함이 회사가 만들어준 첫 명함인 셈이다.     


[명함]

1. 성명, 주소, 직업, 신분 따위를 적은 네모난 종이쪽. 흔히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신상을 알리기 위하여 건네준다.



국어 사전에 쓰인 명함의 의미다. 성명. 주소. 직업 신분따위를 적은 네모난 종이쪽. 이 조그만 네모난 종이쪽 때문에 다시 마음이 복잡해진다. 0건의 충격에 불러들인 운명과 운과 같은 형이상학적 목적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게 있을까 싶지만, 만약 있다면 이건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이젠 쓸모없어진 명함을 내게 보내는 이유가 뭘까.






12년의 시간을 접는데는 그만큼의 긴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작가의 이전글 작별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