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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Sep 21. 2023

한밤의 테헤란

자정이 지난 이맘 호메이니 공항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을 뒤져 스카프를 꺼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렸다. 긴 복도를 따라 혼자 걸었다. 출입국 사무실에 들러 미리 신청한 관광 비자를 찾으러 가는 길이다.

몇 년 전 이곳에서 짧고 기이한 심문을 받았다. 그때는 사전 신청 없이 공항에서 바로 도착 비자를 받는 게 가능했다. 창구 앞에서 양식을 작성한 후 제출하자 뒤쪽에서 날카로운 눈빛의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구석 탁자로 가자고 하더니 여권을 한참 살펴보고 이란에 왜 이렇게 자주 오는지 물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란이 좋아서라고, 약간 더듬거리며 대답하며 내가 모르거나 실수한 게 있는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내게 테헤란에 연락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아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두 사람이 페르시아어로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 이 새벽에 비자 창구에 선 외국인은 단 두 명이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자 건강보험에 가입하고 수수료를 낸 후 수월하게 비자를 받았다. 먼저 와있던 다른 외국인에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갈 때까지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창구 앞에서 끊임없이 항의하는 그에게 비자 담당자는 부드럽고 냉정한 미소를 지으며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텅 빈 입국 심사대에서 수속은 금세 끝났다. 수하물을 찾는 곳으로 내려가자, 유리 벽 뒤에서 아마드가 손을 흔들고 있다. 자그로스 산에서 박티아리 유목민을 찾아다니던 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며칠째 같은 옷에 씻지도 않고 수염이 텁수룩했는데, 삼 년 만에 만난 그는 깔끔한 재킷을 입고 이란의 남쪽 지역에서 겨울에 피는 수선화 한 송이를 들고 서 있다. 아나는 이틀 전에 차를 몰고 케슘 섬으로 먼저 떠났다. 테헤란에서 그곳까지 거리는 1,500킬로미터, 내일 아침 출발할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 테헤란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새벽의 고속도로에 오가는 차가 드물다. 어둠 속에서 낯익은 길을 따라 공항에서 테헤란 시내로 향한다. 멀리 초록과 금빛 조명을 받은 이맘 호메이니 모스크가 보인다.

테헤란 시내의 숙소로 향하며 메인 바자르 부근의 큰길과 좁은 골목길들을 지났다. 아침이면 인파에 휩싸여 부지런히 틈을 찾아 걸어야 하는 길이다. 이 한밤에 바자르 곳곳의 좁은 길들은 캄캄한 어둠에 잠겼다. 좁디좁은 골목에서 숙소 문 앞까지 차로 들어갔다. 케슘으로 가는 아침 비행기를 탈 때까지 잠깐 머물 곳이다. 아마드는 아침 일찍 공항에 태워주러 오겠다며 돌아갔다.


이곳은 이란 전통 스포츠인 주르하네의 영웅, 팔라반 라자즈가 살았던 카자르 시대의 전통 가옥으로 아름다운 디테일이 여기저기 숨어 있다. 이렇게 잠깐 머물다 떠나기엔 아쉽다. 지난가을부터 이란으로 오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거의 끊겨 오늘은 예약도 없이 새벽에 방을 얻었다. 혼자 쓰기엔 너무 큰 침대 세 개가 놓인 구석 자리에 짐을 풀고 수선화를 물컵에 꽂고 잠시 눈을 붙이려다 그만 깊이 잠들어버렸다. 아침에 케슘으로 가는 비행기가 지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텔에서 마련한 조식을 먹을 수 있겠다.


테헤란의 오래된 집에는 크고 작은 안뜰이 있다. 바닥에는 타일이나 돌을 깐다. 정원 한가운데 연못이 있고, 그 아래는 지하 공간이다. 해발 1,200미터의 도시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이 순식간에 지나고 강렬하게 밀어닥치는 혹독한 여름 더위를 견디기 위한 곳이다. 아침을 먹으러 안뜰을 가로질러 계단을 따라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벽돌로 마감한 식당 안은 오래된 다이얼식 전화기, 도자기 꽃병, 복잡한 문양의 벽걸이 직물로 장식되어 있다. 차이, 커피, 난, 버터와 잼, 꿀, 과일, 수프, 샐러드 등으로 구색을 갖춘 아침 뷔페가 차려졌다. 우선 따뜻한 차이 한 잔을 마시며 바삭하게 갓 구운 황금색의 도톰한 바르바리 난에 꿀을 찍어 맛본다. 천천히 골고루 먹을 생각이다. 케슘 섬에 도착하면 늦은 오후일 테니 넉넉하게 배를 채울 이유는 충분하다.

식사를 마치고 아마드를 기다리며 프런트에서 호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주고받느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그가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을 봤다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몇 해 전까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나는 오징어 게임도, 그 영화들도 보지 않았기에 그런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이란의 국내선이 오가는 메라바드 공항은 예전과 다름없이 붐볐다. 케슘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차이 한 잔을 마실 시간이 남았다. 아마드가 서류 가방에서 여자친구가 챙겨준 과자와 케이크를 꺼냈다. 몇 년 전 쌀 포대 같은 커다랗고 낡은 자루에 박티아리 사람들이 만든 정교한 공예품을 대충 뭉쳐 넣었다가 주섬주섬 꺼내던 모습에서 조금은 달라졌다. 아마드가 폰 화면에 띄운 영문 논문 초록을 읽어보라며 건네준다. 석사 논문이 마무리되면 보여달라 했던 걸 잊지 않았나 보다. 지속 가능한 관광 산업을 통해 이란에 얼마 남지 않은 유목민들이 수천 년간 지켜온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자부심을 갖도록 도울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전히 아마드는 어떤 일이든 가능하게 만들 것 같은 에너지가 넘친다. 몇 차례 거부된 관광비자를 어떻게든 받아낸 것도 그였으리라. 아마드와 아나가 현실에서 그걸 실행해 온 지난 몇 년간, 이란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랜 경제 제재에 더해 연료 가격 인상으로 시작된 전국적 시위, 미국과의 전쟁 위기,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 참사, 팬데믹, 한 여성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이란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던 ‘여성, 생명, 자유’를 외친 시위운동까지.


국내선을 타기 전 마지막 보안검색대 앞에서 그가 차이나 커피를 마실 때 쓰라며 이란 돈을 조금 건넸다. 이란에서는 국제 신용카드를 쓸 수 없고 테헤란에서 환전할 시간도 없었다. 케슘은 테헤란보다 맑고 따뜻할 거라며, 아마드는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테헤란에서 아침을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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