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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Nov 10. 2023

마침내 혼자인 밤

아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공항 입구에서 택시 기사들의 예의 바르면서도 끈질긴 시선을 피하며 서 있다가, 진홍색 꽃이 핀 콘크리트 화분 옆으로 가방을 끌고 가 앉았다. 오늘 아침 테헤란처럼 케슘 섬은 흐리고 구름이 낮게 깔렸다. 한참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더니 저기서 아나가 뛰어온다.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쏟아내는 아나의 크고 부드러운 눈은 삼 년 전 그대로다. 길 없는 깊은 자그로스 산속에서 그곳 사람들과 여행객들의 마음을 이어주던 그때처럼. 아나와 손을 잡고 이란식으로 오른쪽 왼쪽 오른쪽 세 번 뺨을 맞댔다. 짐을 같이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며 아나는 이번 여행에 함께 할 사람이 또 있다고 했다. 차분한 인상의 이샨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맑고 조용한 눈빛으로 미소 짓는 그와도 함께 여행하며 편안해질 것 같다.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반이면 섬에 도착한다. 두 사람이 차로 온 길은 테헤란에서 출발해서 케슘 섬까지 꼬박 이틀 걸렸다. 중간 지점이자 아마드의 고향인 케르만에서 하루를 묵고 반다르아바스 항에서 차를 배에 실어 섬에 도착했다. 화살표 모양을 한 케슘은 이란에서 가장 큰 섬이다. 본토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2km 거리이고 바다 건너 오만까지는 60km 떨어져 있다.

날이 개어 구름이 흩어졌다. 공항에서 케슘의 중심지까지 해변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버섯 모양의 커다란 흰 바위들이 햇빛을 받아 짙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땅 위에는 흰 소금 덩어리가 눈처럼 흩어져 있다. 푸른 하늘빛에 녹색이 섬세하게 스며든 바다가 멀리서 반짝인다.


숙소로 가기 전에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 앞에 차를 세운 후 아나는 케르만에서 아마드의 부모님이 신선한 채소를 담아주었다며 짐이 꽉 찬 트렁크를 뒤지기 시작한다. 이란의 다른 곳처럼 케슘의 식당에서도 넉넉하게 채소를 손님에게 내어줄 텐데. 케르만에서 받은 다정한 선물이 내내 마음에 남았나 보다. 아나는 여행하며 받거나 산 음식,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구석구석에 챙겨두었다가 긴 시간 차를 달리며 함께 먹거나 음식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나눠 주기도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뭘 받아 어디에 뒀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온다. 트렁크에는 쟁반과 접시도 있고 뒷좌석에는 과일과 피스타치오 껍질이 담긴 쓰레기 봉지도 걸려 있다. 며칠 후에 차에 실린 음식들을 한번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뒤에 선 이샨을 돌아보니 그의 평온한 얼굴에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식당 안은 본토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선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드물어선지 식당 안의 탁자들이 모두 큼직하다. 우리는 맨 안쪽 따로 떨어진 방으로 향했다. 흙벽에 석회를 발랐고 바닥에는 카펫을 깔았다. 식당에서 일하는 소년이 카펫 위에 얇고 큰 비닐을 한 장 덮고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우선 차이부터 마신다. 맑은 갈색의 따뜻한 홍차를 한입 머금고 서로의 얼굴을 다시 바라본다. 케슘에서는 차이에 대추야자와 참깨를 곱게 간 타히니 소스를 곁들인다. 달콤하고 끈적한 갈색의 열매와 부드럽고, 고소하면서 약간 아릿한 맛이 도는 옅은 모래색의 소스가 잘 어울린다. 잠시 잊었던 허기가 느껴진다. 섬 근처 바다에서 잡은 생선 요리를 맛볼 차례다. 고소하면서 매콤하고 새콤한 맛이 어우러진 생선 스튜를 쟁반을 돌려 가며 나눠 먹는다. 물고기는 페르시아어로 ‘마히’라고 하고, 이 요리의 이름은 ’갈리예 마히‘이다. 페르시아만에서 잡히는 생선은 종류에 따라 손질하고 조리하는 법이 다르다는데, 생선뼈는 언제나 모두 제거한다. 양파, 마늘, 강황, 소금, 후추, 코리앤더와 페누그릭, 토마토 페이스트, 타마린드, 석류 페이스트, 오일을 넣고 끓인 갈리예마히를 버터에 볶아 사프란으로 색을 낸 쌀요리 ‘폴로‘에 얹어 먹는다.


점심을 먹는 사이 소낙비가 내려 식당 앞 도로가 물에 잠겼다.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던 동네 아이들이 낯선 외국인을 한번 쳐다보고 물웅덩이를 헤치고 달려간다. 나는 물 고인 가장자리를 발끝으로 디디며 차에 올랐다. 바다가 보이는 길로 조금 돌아 숙소가 있는 섬의 반대편으로 향한다. 오늘 밤 머물 곳은 여러 세대에 걸쳐 대가족이 살다가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한 집이다. 각각 마당이 있는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었고 그사이에 부엌과 야외 식당이 있다. 내 방은 더 깊숙한 안마당에 면해 있고 아나와 이샨은 바깥쪽 마당 옆에 머문다. 방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대청마루 같은 공간에 잠시 짐을 내려놓았다. 숙소 주인이 차이와 대추야자를 내온다. 아나는 아마드와 통화하며 내일 일정을 점검하느라 바쁘다. 이샨은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페르시아어로 나누다 가끔 통역을 해준다. 천천히 해가 저물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개들이 카펫 위로 올라와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주인이 쫓는 시늉을 하면 잠깐 내려가 마당을 몇 번 가로지르다 아까 누웠던 그 자리로 올라와 눈을 감는다.


마시던 차이를 내려놓고 등을 기댔다. 이샨은 노트북을 꺼낸다. 취미로 음악을 만드는 중이라며 조금 들려주었다. 파도가 조용하게 다가왔다 밀려가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다. 빗자루를 든 소년이 방이 준비되었다며 열쇠를 건네줬다. 크고 무거운 나무 문짝이 방문에 달려 있다. 양쪽으로 문을 밀자, 아래위 문틀에 부딪히며 오래전부터 삐걱거렸을 소리가 난다. 방 안은 두꺼운 흙벽에 나무 여닫이가 달린 작은 창문이 두 개 있고 침대 머리맡과 맞은편 욕실 문 옆에는 깊은 벽감이 보인다. 방문을 닫아걸자 캄캄해졌다. 가방을 끌어다 구석에 놓고 불을 켜지 않은 채 낮은 침대에 누웠다. 나무 덧창 사이로 마당에 건 전등 빛이 스며들어 흙바닥에 비친다. 입은 옷 그대로 누운 침대 시트에서 햇볕에 그을린 소금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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