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Nov 15. 2023

바다에 잠긴 기억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섬의 북쪽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자라는 맹그로브 숲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룻배 정박지 앞에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발끝까지 내려오는 희고 긴 옷을 입은 남자들이 큰북을 두드리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인도 전통 음악을 닮은 흥겨운 가락이다. 본토에서 온 관광객이 장단에 맞춰 양팔을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지나간다.  춤추며 걸어가는 여자를 따라 나룻배에 올랐다. 나뭇가지를 엮어 말린 야자잎을 올린 어부의 오두막이 드문드문 보이는 해안을 지나, 이란 본토와 케슘 섬 사이의 페르시아만 바다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낡고 큰 배 세척이 나란히 떠 있었다. 설계도 없이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지식으로만 완성되는 케슘섬의 전통 목재 선박, ‘렌즈’ 배다. 페르시아만에서 수세기 동안 고기잡이와 진주 채취에 사용되다가 지금은 새로운 선박 기술과 세월에 밀려 맹그로브 숲 언저리에 멈춰 선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셋 중 가장 큰 배에서 내려준 로프 사다리를 타고 렌즈 배 위로 기어올랐다. 오늘 이 배의 손님은 우리 둘뿐이다. 널찍한 갑판에 캠핑 의자와 파라솔이 두 개 놓여 있다. 갑판 난간 너머 햇빛을 받은 바다가 반짝인다. 오늘처럼 고요한 날 페르시아만의 바다는 파란 하늘빛에 녹색이 스민 ‘사브즈어비’ 빛깔이다.



오래 병상에 누워 눈으로만 말하던 엄마는 조용하고 맑은 푸른빛의 그 바닷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점점 더 투명해지던 눈동자에 빛이 반짝이고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그날 동생과 나를 데리고 단팥빵을 사서 가까운 바다로 향하는 버스를 타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른 오후의 맑고 따스한 바닷가 마을에 내려, 모래 위에 겉옷을 벗어두고 집에서 입고 온 수영복 차림으로 손을 잡고 천천히 얕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파도 소리가 조용히 밀려왔다 사라지던 바닷물 속에서 엄마는 동생과 나를 팔에 꼭 안고 모래를 발판 삼아 파도를 타며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했다. 너무 신나서 계속 웃다가 배가 고파질 때까지. 밖으로 나와 대충 물기를 닦고 단팥빵과 우유를 꺼내 먹었다. 그날 먹은 달콤한 빵맛이 떠오르고 부드러운 파도 소리와 환하게 들여다보이던 투명한 물속도 그려지는데, 젊은 엄마의 모습은 희미하다. 동생과 나를 단단하게 감싸던 부드러운 팔과 내 얼굴이 닿았던 수영복의 촉감만 깊은 기억 속으로 가라앉았다.



맹그로브 숲 가까이 가려면 바나나 보트를 타야 한다. 아나와 나는 로프에 매달려 다시 기어 내려갔다. 내리기 전에 렌즈 배의 주인이 보트 조종법을 알려줬다. 팔자를 그리며 노를 양쪽으로 휘저으면 앞으로 나가고, 오른쪽으로 가려면 왼쪽을, 왼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을 저으라고 했다. 둘 다 수영할 줄 모르는데 괜찮을까. 구명조끼를 입었으니 걱정 말라며, 무슨 일이 있으면 구해주겠다는 장담을 믿고 일인용 보트에 각자 올랐다. 노 젓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빨리도 저어보고 오른쪽,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보았다. 저 멀리 맹그로브 숲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속력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청록빛 바다 위에서 노란 보트를 타고 있으니 어디서든 서로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숲에 다다르자 사진을 찍을 휴대폰 카메라가 아쉬웠다. 기억 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다. 맑은 바닷물 속에 뿌리를 잠근 채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들이 구부러진 가지를 물 위로 밀어 올려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수로를 만들었다.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들어와 물 위에서 흩어지는 광경을 한참 바라봤다. 아나가 반대쪽에서 돌아오며 손을 흔든다. 그쪽으로 노를 저어 아나의 보트에 가볍게 부딪쳤다. 잠시 노를 걸쳐 놓고 페르시아만의 잔잔한 물결에 보트를 맡겼다. 지난 삼 년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조용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장소는 없을 것이다.



오래전 맑고 따스한 물빛을 떠올리며 화장장에서 뼛가루를 한 줌 덜어냈다. 엄마의 몸은 삼베 수의와 꽃버선에 싸여 나무 관에 담긴 채 화로로 향했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흐르고 철문이 열렸다. 금속판 위에 약간 솟아오른 잿가루가 머리에서 발까지 뼈 모양으로 남았다. 유리벽 뒤에서 재를 흩트려 쓸어 모은 후 곱게 가는 걸 지켜봤다. 마무리될 때쯤 벽에 난 입구로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거기 담긴 짙은 회색재는 엄마의 어디쯤이었을까. 나머지 재는 도자기 유골함에 담겨 낯선 선산에 묻혔다. 몇 달 후 작은 유리병을 들고 오래전 그 바다의 도시에 들렀다. 살던 집 주소에서 시작해서 지도를 보며 가장 가까운 바닷가로 향했다. 바다로 가는 길은 기억보다 가까웠다. 작은 마을 앞 도로에서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찾았다. 돌계단을 내려가 폭이 좁은 모래밭 너머 푸르게 맑은 바다에 도착했다. 그날처럼 잔잔한 수면이 부드럽게 반짝인다. 모래 위에 앉아 바다를 한참 바라봤다. 틀림없이 여기였을 것이다. 병뚜껑을 돌려 열어 손바닥에 재를 부었다. 바다로 다가가 꼭 쥔 손을 물속에 넣었다. 내 손을 감싼 파도가 멀리 밀려갈 때 손가락을 펴서 함께 밀었다. 물속 모래에 닿은 재가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