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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하 Mar 11. 2024

깨진 렌즈 Fractured Lenses

서울시립미술관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무제프로젝트 


깨진 렌즈


찢어진 지도 조각과 얕은 지식으로만 무장하고 낯선 곳을 탐색한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그 미지의 땅에서 하늘과 나무의 색상, 태양의 상대적 위치를 찾고, 지형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그림자의 특성을 분석하고, 식물과 토양의 유형을 식별하고 도로 표지판을 읽는다. 이제 구글 스트리트 뷰 이미지를 기반으로 위치를 맞추는 온라인 게임 지오게서(GeoGuessr)를 플레이한다고 상상해 보라. 마찬가지로 이 게임에 몰입한 우리의 동공은 빠르게 화면을 가로지르며 색상, 글자, 지형의 유형을 식별한다. 광활한 디지털 이미지의 이러한  요소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 이곳에서 정교하게 구성된 지구를 돌아다니며, 픽셀과 지형에서 단서를 엮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 존재의 복잡한 지형에서 내비게이터로서 타인을 식별하고 이해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당신)는 당신(나)을(를) 인식하고 이해한다"와 같은 묘한 확언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 확언은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 경험의 메마른 풍경 속에서 실존적 공허함을 채울 의미를 열심히 찾고 있는 우리에게 단 하나의 목적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푸른 꽃”[1] 같은 것을 찾기 위해 끝없이 스크롤링하고 클릭하다 보면 우리의 시도가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유령을 사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의 표식을 우연히 발견하더라도 그 의미는 시야에서 금방 사라지는 유령처럼 덧없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영원히 붙잡고 싶었던 소중한 순간이 점점 흐려져 가고, 우리가 믿는 그 결정적인 표식이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탈주할 수 없는 루프에 빠지게 되고, 우리 모두에게 깊이 뿌리박힌 외로움과 슬픔을 덜어낼 수 있는 상징을 찾아 끊임없이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는 우리의 손아귀에서 점차 빠져나간다. 나는 이 슬픈 사람들을 '깨진 렌즈'를 가진 사람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이들의 시도가 그 렌즈를 더욱 깨뜨릴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서 있는 이 공간에는 이름 없는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무제' 영역에는 극적으로 확대되거나 축소된 네 개의 이미지가 각 사진의 수평선을 따라 일렬로 정렬되어 있다. 만약 당신이 이와 동일한 수평선에 서 있다면, 전시된 작품의 일부만 볼 수 있다. 혹은 어느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네 작품의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거창하고 보편적인 관점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이미지를 온전히 감상하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또한 물 위에서 불타고 있는 캔버스 사진을 제대로 보려면 벽면에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이 위치에서 그 대형 이미지는 망점으로만 보여 그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반대로 그 불타는 캔버스를 멀리서 보면 그저 붉은 얼룩처럼 보인다.


네 점의 이름 없는 작품을 온전히 관람하기 위해선 관점은 ‘깨진 렌즈’처럼 파편화되어야 한다. 각 지식이나 해석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거나 완전하지 않다. 오히려, 각 지식은 특정 문맥과 위치에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2] 본질적으로 파편화된 각자의 ‘깨진 렌즈’는 우리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을 위한 적절하고 각기 다른 위치, 즉 다중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다시 우리의 끊임없는 스크롤링, 의미에 대한 끝없는 시도로 돌아가면, 슬픈 우리는 이 탐험이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미지가 거리에 따라 선명해지거나 흐려지는 것처럼, 우리가 들고 있는 ‘깨진 렌즈’는 다양한 층위의 읽기와 문맥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에서 소통의 길을 열어준다. '깨진 렌즈'는 우리가 수많은 단서를 이해하기 위해 각기 다른 적절한 위치에서 그 복잡한 세계를 바라보도록 안내한다. 이는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상대성과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해를 향한 무한한 탐험에서 절망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을 지닌 푸른 풍경을 발견한다. “우리는 비록 소통이라는 순수하고 순진한 행동을 잃었고, 그래서 울고 있지만”[3], 이제 나(당신)는(은) 여기에 "나(당신)는 당신(나)을(를) 인식하고 이해한다"라는 확언을 반복한다. 그리고 ‘깨진 렌즈’를 들고, 그 렌즈를 기꺼이 우리의 눈 가까이 대고, 당신(나)을(를) 바라본다. 




[1]  “푸른 꽃”은 노발리스의 소설 유작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1802)에서 가져왔다. 

[2]  도나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에 관한 연구에서 영향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Haraway, Donna.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Feminist Studies, vol. 14, no. 3, 1988.

[3]  히어트 로빙크, 「의도된 슬픔」, 『유로진』, 2019년 1월 10일 발행, https://www.eurozine.com/sad-by-design/.





Fractured Lenses


Imagine navigating unfamiliar terrain, equipped only with fragments of a tattered map and limited knowledge of the landscape. In such wilderness, we interpret the colors of the sky and trees, understand the interplay of light and shadow on the terrain, read road signs, ascertain the sun's relative position, and identify various kinds of plants and soil. Now, consider playing GeoGuessr—a game that beckons us to identify our standing in the world through the prism of Google Street View. Just as we decode the real world around us, our pupils flit across the screen in rapid oscillations, identifying colors, letters, and patterns. Each element becomes a clue to identify one thing: "Where we are." Just as we weave through GeoGuessr's curated Earth, stitching together clues from pixels and terrains, we, as navigators in the complex topography of human existence, have the instinct to identify, understand, and communicate with the other engraved within us. 


In this vein, contemplating elusive affirmations like "I (you) perceive and understand you (me)" might be a meaningful endeavor. This is because these phrases might serve as a singular destination for those of us who are voraciously hunting for meaning to fill our existential void. Yet, as we endlessly scroll and click in a futile search for such elusive affirmations, we find ourselves chasing illusions that, much like fireworks, burst into view only to quickly fade away, leaving nothing but smoke—reminiscent of the "blue flower."[1] Yes, we're hunting ghosts of 'understanding each other.' Even when we stumble upon such markers of understanding, their significance is often fleeting, resembling a ghost who quickly fades from sight. Or perhaps, the precious moment we'd wished to hold onto forever gradually fades away, its definitive marker, in which we'd believed, becoming a dim memory. This leaves us in a recursive loop, retracing our steps in a never-ending quest for symbols that might alleviate our collective, deeply situated loneliness and sadness. In this pursuit, the clues of each other's understanding become elusive, slipping through our grasp. In this wilderness of life, for those who endure this sadness, I would like to call them persons holding a 'fractured lens,' with each attempt further fracturing their lens.



In the sp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a constellation of nameless works. In this 'Untitled' area, there are four photographs, either dramatically magnified or minuscule—all aligned with the horizon. In this wilderness, standing at the same horizontal line, you may perceive only a fragment, or perhaps nothing comprehensible, of the four artworks on display. This is because there is no grand, universal standpoint from which the essence of all four pieces can be clearly identified or understood, nor can one apprehend the four visual enigmas at once. For example, to fully appreciate the large image that fills one wall, you need to distance yourself; up close, you'd only see the halftone dots that constitute it. On the other hand, if you're near the wall to examine a detailed image of a burning canvas on water, the larger image becomes a blur again. If you then step back to see the large image from a distance, the image of the burning canvas becomes a mere blotch of red. 


In order to fully appreciate the four unnamed works, our viewpoint must be as shattered as a 'fractured lens,' recognizing that no single piece of knowledge or interpretation is absolute in itself. Instead, complete understanding emerges only within particular contexts and locations.[2] In this way, the diversity of 'lenses' fosters a range of perspectives and interpretations, each of which gains clarity in varying contexts and locations. Just as with our individual 'fractured lenses,' the essential fragmentation guides us not toward distortion but toward multiplicity—toward the appropriate and distinct locations that offer interpretations as varied as we are. 


Returning to our relentless scrolling, our interminable attempts at meaning, we as the sad creatures realize this is not a futile expedition. The 'fractured lenses' we hold open up different layers of myriad readings, contextual understandings, and most vitally, modes of relational communication, just as an image sharpens or blurs with distance. Like the pixels in a photo that either sharpen or blur depending on distance and the endless clues that require a complex interpretive framework for spatial understanding, our fractured lenses necessitate fragmented, situational approaches for true comprehension. This is not a mere methodology, but an ethos that recognizes the relativity and imperfection inherent in all of us. In this infinite journey towards understanding, we unearth not despair but a lush landscape of possibilities. Although "the naïve act of communication is lost—this is why we cry,"[3] —I (you) now repeat the phrases: "I (you) perceive and understand you (me)." Right here, among the nameless works, I (you) willingly lift the fractured lens, place it directly in front of our eyes, and gaze intently upon you (me).




[1]  The 'blue flower' is a metaphor for unattainable ideals or desires. The imagery is borrowed from Novalis's unfinished novel Heinrich von Ofterdingen (1802), where the 'blue flower' stands as a symbol for romantic yearning and has since become iconic in German Romanticism.

[2]  This concept is largely influenced by Donna Haraway's work on situated knowledges. See Haraway, Donna.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Feminist Studies, vol. 14, no. 3, 1988.

[3]  Geert Lovink, ‘Sad by Design’, Eurozine, 10 January 2019, https://www.eurozine.com/sad-by-design/.





* 본 원고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의 '무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여졌다


〈무제 프로젝트〉는 세 기관의 소장품 중 제목이 ‘무제’인 작품을 각자의 방식을 통해 읽어보는 프로젝트이다. 초대된 세 명(장은하, 텡옌후이, 루하 피피타)의 기획자들은 작품에 관한 이야기나 작가의 창작 의도 등 배경지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자신의 관점과 경험, 지식을 바탕으로 작품을 해석하여 새로운 의미 만들기와 연결하기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행위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기관과 지역에 따라 그 행위는 어떤 결과를 만드는 지를 논한다. 또한 지식의 불안정성과 상대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이해’와 ‘경험’을 인정하고, 초상에 자신을 투사하는 행위를 작품 읽기에 유비하며 해석과 감상의 자율성과 성찰적 성격을 논하기도 한다. 각자의 독해 경로를 따라 엮어낸 이야기는 배경지식 없이도 성찰과 해석을 통해 자유롭게 작품을 읽고 감상할 수 있음을, 또 우리는 작품을 통해 말과 글을 넘어 서로 다른지식과 이야기를 잇고 나눌 수 있음을 보여준다.


Convening the Untitleds is an attempt to read the untitled works from the collections of the three institutions in various ways. The three invited curators (Eunha Chang, Teng Yen Hui, Ruha Fifita) deliberately exclude background information such as the narrative of the artwork and the intentions of the artists, and interpret the artworks based on their own perspectives, experiences and knowledge, attempting to connect it with new meanings. In the process, the fundamental meaning of the act of giving a title to an artwork is discussed, along with the consequences of that act in different institutions and regions. The autonomous and reflective nature of interpretation and appreciation are raised, acknowledging the inevitable natures of understanding and experiencing due to the instability and relativity of knowledge, and the act of projecting oneself into the portrait. The stories woven along their respective readings

show that we can freely read and appreciate artworks through reflection and interpretation of our own without having knowledge, and that we can connect and share different knowledge

and stories through artworks beyond words and tex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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