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
꽃과 사자는 동시에 낮잠을 자고 있다. 1년에 두어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의 날이 바로 오늘이다.
주말에 몹시 추웠던 캠핑으로 둘 다 감기에 걸렸는데 증상은 약간 다르다. 꽃은 콧물과 함께 목에 가래가 그렁거리는 한편 사자는 콧물만 난다.
지난 5년 동안 편도선염으로 Urgent care에 한번 갔을 뿐 딱히 병원 신세를 진적은 없는 꽃이지만 아무래도 기관지가 약해서 1년에 두어 번 목감기가 찾아온다.
내가 기억하기로 꽃은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앓아누운 적이 없다. (티비를 세네 시간씩 본 적은 많다.) 목이 아파도 국물이 있으면 여느 때처럼 먹고 여느 때처럼 노는 편.
다운증후군 딸의 체력이 좋은 건 분명 감사할 일이다. 그럼에도 잠을 푹 잔다고 할 수 없는 둘째와 동시에 키우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할 만큼 하고 한 명이 자는데 다른 한 명을 위해 뭔가를 더할 여력은 없는 것이다.
꽃이 낮잠을 잘 거란 기대는 한참 전에 내려놓았으나 이번 주처럼 주 4일 2시간 40분인 학교나마 가지 않고 있을 적엔 이중적인 마음이 든다.
많이 아프지는 않길. 그래도 이왕 아픈 김에 낮잠 좀 자기를.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오늘은 둘 다 오침을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이른 저녁으로 소고기를 세 점 굽고 있는 대로 상을 차렸다. 아이들이 치대지 않고 먹는 밥은 뭘 먹어도 그렇게 맛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이불을 나눠 덮고 소파에서 자고 있는 꽃과 사자의 형태만 봐도 귀엽게 느껴진다.
아까만 해도 어땠던가? 둘 데리고 산책 나갔다가 후회할 뻔했다. 요즘은 도를 닦고 또 닦는 중이라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차고 문을 여는 순간 꽃이 짜증을 내며 차 옆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렸다. 사자가 자기보다 먼저 걸어 나가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1차 도 닦기. 힘들게 옷을 입히고 나왔는데 출발부터 꼬이면 내 신경도 예민해진다. 참을 인을 가슴에 새기기로 한다.
차고는 추우니까 햇볕으로 가자고 해보았다. 살짝 동하는 것 같아 할로윈 장식을 많이 한 이웃집에 새로운 고스트가 생겼다고 하니 제 발로 걸어 나왔다. 평소보다 훨씬 쉽게 풀린 것이다
고스트를 잠깐 보고 길을 재촉했다. 추워서 여차하면 바로 들어가고 싶은 내 욕심과 달리 꽃은 대각선 건너편 공원에 가겠다고 했다. 반면 사자는 진작부터 길바닥에 앉아 메뚜기 구경을 하고 있었다.
차가 오지 않는 이상 서로 가려는 방향이 다른 것은 도 닦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집 벗어나는 게 목적인 날도 많았기 때문이다.(혹은 그 “덕분이다.”)
한동안 메뚜기처럼 기고 뛰던 꽃과 사자는 드디어 메뚜기에게 인사를 고했다.
두 아이를 보도로 걷게 하느라 울화통이 수백 번 터진 기억이 나서 절로 긴장되었다. 다행히 둘 다 사이드 워크로 걸어갔다.
꽃이 “손” 하니까 사자가 누나 손을 잡고 코너에 도착했다. 차가 보이지 않아도 연습 삼아 멈춘 후 건너게 했더니 그것 또한 잘했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줄 알고 심장은 두근두근.
그런데 웬 걸? 사이드 워크에 도착하자마자 꽃이 성질을 부렸다. 사자가 손을 놓고 빨리 걸어가서인 걸로 추정된다.
꽃은 사자가 자기보다 잘하는 걸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기가 누나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보통의 남매라면 다섯 살이 세 살보다 훨씬 앞서는 게 당연하니 이 누나 DNA는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뼈아픈 현실이 있지 않은가. 28개월 남아는 이미 누나보다 덩치가 더 크다. 신발 사이즈가 같지만 꽃은 평발이고 사자의 발은 두툼해서 힘도 지구력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기 동생이 어느새 자기를 앞질러 가는 걸 인정하기 쉽지 않겠지. 내년이 되면 꽃이 조금 자란 사이 사자는 훌쩍 더 자라 있을 것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듯하다.
나의 2차 도 닦기는 시작되었다. 예전 같으면 으르고 달래고 욕까지 했을 상황에 꽃 옆에 서서 안아주겠다 (그래도 싫단다.) 사자 있는 데까지만 가자 (그것도 싫단다.) 아니면 집에 가자 (역시 No!) 말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엄마의 고충도 몰라주고 자기 갈길로 달려가는 사자한테도 화를 내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봐주다가 누나 혼자 있으면 위험한데 엄마는 one, 너희는 two라고 설명했다.
사자가 자갈밭에서 속도를 늦춘 사이 꽃한테 장난치듯 밀다시피 안다시피 해서 우리도 도착했다. 최소한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너무 빨리 걸을 수 없고 차량도 없다.
그 뒤로도 아이들과 걷는 건 인내심이 필요했다. 세찬 바람이 부는 날에 굳이 흙놀이를 하겠다는 아이들. 어차피 말릴 수 없을 거 시멘트에 앉으라고 옮겨주니까 거기 앉아서 한참 땅을 팠다.
그다음엔 꽃이 걷지 않으려고 했다. 늘 염두에 두고 있는 평발이 신경 쓰여 안았다가 내렸다. 계속 걷지 않겠단다. 사자도 점점 게을러지는 게 보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Run Freeze를 하니 그제야 웃으면서 조금 뛰어갔다. 건너편 공사장 아저씨들이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길에 속으로 웃픈 눈물이 흘렀다.
30m 이동했을까? 뒤에 오던 사자가 남의 집 잔디 위를 무릎으로 기어 다니다가 급기야 바닥에 엎드렸다. 순간적으로 “엄마 힘든데 너라도 잘해야지!”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꽃과 사자는 주어진 운명대로 태어났다. 꽃은 700분의 1이라는 확률로 엑스트라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고 사자는 그 누나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당연히 둘은 서로의 영향을 받겠지만 두 아이를 싸잡아 키울 필요는 없다. 꽃은 꽃이고 사자는 사자인 것이다.
꽃이 감정 절제가 어려워서 평균 이상의 Tantrum을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아직 한창 그럴 나이인 사자에게 너라도 개구쟁이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사자를 개별 인격으로 대하는 처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대소변 훈련이 되지 않는다고 “누나가 안 되니까 너라도 좀 해.”라고 한다든지 꽃이 아직 숫자를 못 센다고 “누나가 못 하니 너라도 제대로 세.”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가르친 적은 없지만 듣고 배운 사자에게 숫자란 one two seven nine ten이다.)
그렇게 3차 도를 닦고 집에 도착했다. 분에 가득 차서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집 안으로 던져 넣으며 끝났던 지난날들에 비하면 서로 선방한 셈이다. 아이들도 좀 컸고 내 마음도 1인치 자랐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