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과사자 Nov 23. 2021

콜로라도의 다운증후군 복지

Gigi’s playhouse Denver를 다녀와서

나의 딸은 다운증후군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 하나는 바로 장애가 있어도 그나마 미국이라서 낫지 않냐는 것이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다운증후군 확진을 받고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빠져서 “다운증후군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경우” 같이 터무니없는 검색어 말고는 떠오르지 않을 때도 “미국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우습고도 수동적인 기대가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국이잖아.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미국이 어디냐고 묻는 경우는 없는 나라! 그 유명세가 어떻게 장애인의 인권에까지 연결되는지 정확한 고리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도 남편도 그냥 그럴 거라 막연히 믿었다.


미국은 과연 알아서 했을까? 다운증후군이라도 미국이라서 나았을까? 우리가 경험한 콜로라도를 기록해 보겠다.





1. 첫 기억은 병원에 있다


태아가 너무 작아서 36주에 정밀 초음파를 하고 37주가 되자마자 유도 분만을 하면서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산부인과 의사를 대신해 처음 딸의 다운증후군을 발견한 사람은 소아과 의사였다.


증거는 찢어진 눈, 낮은 코 등의 특징적 얼굴과 팔을 들어도 머리가 따라오지 않는 로 머슬 톤.


소아과 의사는 니큐로 딸 검진을 올 때마다 나를 앉혀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했다.


왜 하필 내 아이에게 이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화가 났던 나는 “다운증후군이어도 괜찮다. 잘 큰다.”라고 말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일이 아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라리 자폐라면 경증일 가능성이라도 있지 다운증후군은 백 프로 지적 장애에 온갖 질병을 동반하잖아요. 당신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라도 괜찮다고 할 수 있겠어요?”라고 따지듯 물었다.


무례한 질문에도 그녀는 차분하게 자기라면 자폐보다 다운증후군을 택할 것이고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선한지에 대해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런데 나는 그 행복하다는 표현도 싫었다. 남들만큼 사고를 할 수 없으니 행복한 거겠지! 행복이란 단어조차 나를 분통 터지게 했다.


하지만 소아과 의사는 대부분의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자기의 염색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놀라운 소름이 끼쳤다. 나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착각했던 나의 무의식에 다운증후군은 곧 바보라는 공식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사회가 심어준 것일 수도 있고 인간의 단순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남보다는커녕 남만큼도 가지지 못했다는 걸 알고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장애인처럼 생기고 장애인처럼 행동할” 내 딸이 그럴 거라고 한다.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으면서도 눈을 뜰 때마다 우리를 한 번 보고는 안심이라는 듯 다시 잠드는 내 딸이 바보가 아니라 행복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 거라는 간접적 일깨움을 준 사람은 소아과 의사였다.


그 외 병원에 있던 모든 간호사들도 우리와 딸에게 친절했다. 기다리는 동안 읽으라고 다운증후군 아이의 삶에 관한 책을 갖다 주기도 했고 다운증후군 중에 이런 사례를 찾았다며 알려 주기도 했다.


그 당시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아무리 긍정적인 말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다운증후군 아이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또 의심할 뿐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2017년 1월의 그 병원이 따뜻하게 기억될 수 있는 건 다 그들 덕분이다.



2. 콜로라도의 다운증후군 복지


태어나서 처음 만나본 인도네시아인과 결혼을 하고 여기서 살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미국 콜로라도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를 열망하는 편이 아니었던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것도 얼떨떨한 판에 딸이 처음부터 특별한 염색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모두들 특별하고 싶어서 난리인 이 세상에 아무도 원하지 않는 특별함을 딸이 가지고 태어났고 내겐 그 딸의 엄마 역할이 주어졌다.


세계 최강국이라 불리는 나라니까 장애인에 대한 시스템도 (최강까진 아니라도) 강국일 거라 생각하며 보름 후 딸을 데리고 니큐를 나섰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 정보는 병원을 통해 이미 받은 상태였다. 하나는 다운증후군 어소시에이션, 다른 하나는 이매진!, 나머지는 콜로라도 어린이 병원에 다운증후군 전문 부서 시센터. 그중 앞에 두 곳과 최근 알게 된 지지의 플레이하우스를 소개하려고 한다.



로키 마운틴 다운 신드롬 어소시에이션

Rocky mountain Down Syndrome Association


우리에게 다운증후군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니큐로 찾아온 두 미국인 가족이 있었으니 바로 RMDSA라고 불리는 로키 마운틴 다운 신드롬 어소시에이션 가족이었다.


당시 이미 청소년이었던 그들의 아이들을 한번 보고 싶다는 우리 요청에 기꺼이 아이를 데리고 와 주었다.


치어 리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녀와 온갖 스포츠를 즐긴다는 소년.


“다운증후군임에도 평범한 모습” 이길 바란 우리의 비정상적인 환상에 그들은 그렇게 가깝지 않았다. 우리 딸도 이렇게 크겠구나. 멀리서 봐도 알아챌 수 있는 이런 외모를 하고 있겠구나..


이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잔잔한 바다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그들과 폭우가 몰아치는 상태인 우리 사이에 큰 공감대가 형성되지는 못 했다. 그럼에도 같은 다운증후군이라는 이유만으로 시간을 내어준 그들이 참 고마웠다.


RMDSA는 다운증후군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모여 시작된 비영리 단체이다. 한국보다 두 배 넘게 큰 콜로라도에서 우리 동네에도 소모임이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자주 참석한 건 아니지만) 코비드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이 있었다. 개인 집에서 팟럭으로 진행되다가 수영장이나 체육관을 빌리기도 하고 연말에는 전체 크리스마스 파티도 연다.


한 번씩 스피커를 초대하기도 하는데 대학 프로그램을 마친 다운 청년의 경험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희망으로 가득 차기만 한 현실은 아닐지언정 누군가는 고졸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코비드 이후로 제대로 된 모임은 없고 연말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해 주고 있다. 작년에 우리는 키즈 죽마와 책 두 권을 받았다. 그렇게 요청한 선물 외에도 기부받은 인형까지 덤으로 챙겨주었다.


올 11월 초에는 예외로 노스 덴버 (만) 0세에서 5세 모임이 있었다. 세 살 아들을 둔 자원 봉사자 엄마의 주도 하에 키즈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2019년생인 둘째는 코비드 때문에 처음 가보는 곳이라 지금까지도 그때 기억을 말하곤 한다.


RMDSA에서 하는 가장 크고 의미 있는 행사는 Step up이라는 걷기 대회라고 생각한다. 콜로라도 곳곳에서 덴버 시티 파크로 모인 다운증후군 가족들이 팀을 만들어 기금 모금도 하고 우리처럼 약간의 기부 후 그냥 걷기도 하는 날. 그날이 다시 오기를 바라본다.



이매진!

Imagine!


이매진! 은 다운증후군뿐 아니라 각종 장애인들에게 정말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 비영리 단체이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혜택은 만 3세가 되기까지 홈 떼라피를 받았던 것이다.


비용은 보험으로 처리되고 나머지는 펀드로 충당한다. 치료사를 찾는 것부터 비용 청구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매진! 이 알아서 해준다.


크게 물리치료, 작업 치료, 언어 치료, 놀이 치료 중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하면 된다. 우린 처음엔 물리치료만 일주일에 한 번씩 했고 첫 돌이 지나면서 나머지 치료를 번갈아가며 추가했다.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이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때가 되면 할 건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어서 우리는 치료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여행 갈 때는 일주일 쉴 거 이주씩 쉬기도 했도 딸이 자고 있으면 굳이 깨우지 않고 (미안해하는) 치료사와 수다를 떨었다.


한국처럼 바쁘게 아이를 차에 싣고 이곳저곳 다니지 않아도 되니 아이를 유심히 볼 여유가 있었고 그래서 발달에 맞게 필요한 연습을 내가 많이 시킬 수 있었다.


14개월에 네발 기기를 하면서는 힙 헬퍼라고 불리는 쫄쫄이 바지를 사서 다리가 벌어지지 않게 도와주었고 16개월에 계단을 제법 오르내릴 때부터는 미끄럼 틀이나 Ride-on 장난감을 구비했다. 걷지는 못 해도 몸을 쓰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덕분인지 꽃은 로 머슬 톤에 비해 자세가 좋고 킥보드 자전거 등 뭐든 잘 탄다


세 돌 이후로는 모든 서비스가 공립학교 프리 스쿨로 넘어간다.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 프리 스쿨을 무료로 다니면서 (참고로 딸 학교 기준 하루 2시간 40분 주 4일에 약 35만 원.)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치료는 명분뿐인 듯한 느낌이 적잖게 있지만 그게 어딥니까?


그렇게 이매진! 의 혜택이 끝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네 돌부터는 일 년 치 보조금을 준다. 펀드에 따라 금액은 달라지는데 평균 3,4백만 원에 달하는 듯하다.


그 보조금으로 치료를 받든 치료에 도움 되는 장난감을 사든 병원비로 쓰든 그건 우리의 자유다. 코비드로 인해 기저귀 같은 필수품도 승인해 준다.



지지의 플레이하우스

Gigi’s Playhouse


멋진 청년 상욱 씨의 아버님으로부터 미국에 지지의 플레이하우스라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찾아보니 다운 신드롬 센터라고 한다.


장애인 중에서도 다운증후군에 집중하는 곳이라니! 이곳 역시 비영리 단체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자원하여 모든 프로그램이 무료로 제공된다.


홈페이지만 봐서는 참여하는 법을 모르겠어서 이메일을 보냈더니 곧 답장이 왔다. 덴버에는 이제 막 열었기 때문에 (올 10월 개원) 한 가지 프로그램만 대면으로 진행된다며 예약 링크를 알려 주었다.


11월 셋째 토요일 오후 12시에서 1시 30분. 모든 연령대를 위한 놀이라니 별로 감은 오지 않았다. 일단 가보기로 한다.


집에서 60킬로, 50분 거리인 지지의 플레이하우스에 가기까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바로 전주 딸의 반에서 코비드 확진자가 나와서 코비드 테스트 후 자가격리를 했으나 다행히 음성 판정을 받았고 일주일 새 딸의 감기도 거의 다 나아서 마음 편히 갈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뭐 하나?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진땀을 몇 번 빼고 나서야 지지의 플레이하우스에 도착했다.


전 연령이라도 청소년 모임이 따로 있어서인지 3,4세의 아이들만 참석한 상태였다. 정원 열 가족 중 일곱 가정이 왔고 관계자 세 명에 자원봉사자 두 명이 있었다.


오늘의 놀이는 펌프킨 센서리 빈, 칠면조 만들기, 칠면조 날개 줍기.


꽃이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부엌 놀이만 하고 있어도 그들은 그 자체를 인정해 주다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꽃이 잠깐이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꽃을 포함해서 세 명의 아이들이 막판까지 남아 있었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뭔지 모를 편안함이 공기 중에 흘렀다. 꽃은 자신 있게 다른 친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놀이를 주도했다.


거기 있는 모든 어른들이 다운증후군 아이의 가족이어서 반응이 사려 깊었다.


꽃이 점프하고 있으면 모든 매트를 둥글게 배열해서 아이들이 다 같이 돌며 놀 수 있게 해 주었고 아이가 뭔가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끝내버리는 게 아니라 moreall done 중에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그날은 지지의 플레이하우스 외에 한국 장도 가고 메이시스 백화점도 가느라 총 6시간을 나가 있었다.


다운증후군 친구들과 놀고 와서 기분이 좋았던지 꽃은 짜증도 내지 않고 모든 이동 과정을 잘 따라주었다. 무엇보다 중간에 10분 정도 낮잠으로 충당된 딸의 체력에 감사한 날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전부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었던 부분이다. 이 정도면 다운증후군이어도 미국이라서 낫다는 게 적합한 표현인 걸까?


RMDSA도 지지의 플레이하우스도 자식이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나서야 이 사회에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부모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내셔널 다운 신드롬 어소시에이션부터 본다고   역사는 1970 80년대를 지나오면서야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마저 부족했기에 2003 지지의 플레이하우스가 설립된 것이다.


오랜 편견을 깨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장애아를 키울 수 있다고 믿은 부모들 덕분에 그 뒤로 태어난 아이들은 시설에 보내지지 않았다.


조기 개입이나 학교에서 교육받을 권리 등 보호를 받고 있으며 공식 시스템이 그렇기에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장애인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다운증후군이어도 미국이어서 그나마 나은 것보다는 아이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들이 있고 또 그것을 한국보다는 한 발 앞서서 이루어내고 있는 미국이기 때문에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그런 자리에 꾸준히 참석하고 나부터 편견을 바꾸는 것이리라. 장애인 딸을 슬프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딸의 작은 성취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리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꽃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당당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는 날이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