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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과사자 Sep 21. 2022

다운증후군 악어 소녀의 하루

도보 등교의 시작


미국도 주마다 카운티마다 다르지만 꽃이 다니는 공립학교는 매년 8월 셋째 주에 새 학기가 시작된다.


만 2세 반부터 5세까지 총 3년 동안 6학기의 프리 스쿨 과정을 끝내고 유치원 Kindergarten에 입학하게 된 나의 첫째.


K-12라고 해서 킨더부터 고등학교까지가 정식 학령기로 여겨지기 때문에 나는 장애아의 부모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지 적잖은 고민을 했다.


백번을 생각해보고 앞구르기 뒷구르기를 다 해봐도 꽃이 학업적으로 비슷하게라도 따라갈 확률은 0.01% 일 것이다. 그것은 딸을 믿고 말고가 아닌 삼염색체에 달린 문제이니 말이다.


올해는 알파벳을 떼겠다거나 숫자를 10까지라도 틀리지 않고 셀 수 있기를 바라는 것보다 내가 꽃과 함께 할 수 있는 현실적 목표는 무엇이 있을까 숙고하다 보니 당장의 학습 능력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하고 또한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체력”.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체력은 국력 아니던가! 체력이 바탕된다면 나중에 뭐를 해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학 첫날부터 지금까지 (꽃은 별생각 없고 남편은 그럴 의지가 없으니) 나의 목표는 아침마다 걸어서 등교하는 것이다.


아침에 너무 귀찮아서 자전거로 꽃을 데려다줬다면 하교 시간에라도 걷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다행히 꽃은 조금씩 걷는 것이 나아지고 있다.


첫 며칠은 650미터 거리의 반 정도를 안고 걷다가 그 뒤로 점점 스스로 다 걷게 되었고 그러다 걷기 싫은 날에는 알아서 앉았다 가거나 내가 안으면 바로 walk라며 내려 달라고 하게 되었다.




도보 하교의 시작


한 달이 훌쩍 넘은 오늘부터는 등하교를 다 걸어서 하는 걸로 계획을 변경했다.


가장 큰 동기 부여는 우리 네이버후드에 사는 또래 아이들 상당수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이 학교에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이웃들이 살짝 놀라는 반응을 느낀 적도 있었고 나 자신도 딸이 이렇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했는데 35도의 날씨에도 걸어갔다 걸어오는 다른 아이들을 계속 보다 보니 꽃이라고 못하란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동생이 픽업 때마다 따라오니 괜히 말 안 듣는 꽃을 따라 사자도 내 속을 터지게 하는 날들이 연속되면서 나는 내 뜻에 맞게 상황을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제 식식거리며 집에 오자마자 남편한테 보낸 통보 문자는 이러하다.


“내일부터 꽃과 걸어올 테니
3시 20분부터는 무조건 사자와 집에 있어라!

어제도 그렇고 오늘 아침에도 단호한 말투로 “학교에 걸어가고 집에 걸어올 거야!”라고 못을 박아놔서인지 동생 없이 나타난 엄마가 자기한테만 온전히 집중해서인지 꽃은 군말 없이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아침에 15분 걸어서 학교 가서 6시간 30분을 보내고 30도가 넘는 날에 다시 걸어서 집으로.


예전의 꽃이라면 바닥에 주저앉고 몸을 오징어로 만들었을 법도 한데  꽃은 기분 좋게 장난을 치며 꾸준히 걸었다.


꽃이 좋아하는 작은 옹벽을 지날 땐 거기에 앉아서 몇 초를 보내기도 했고 작은 다리 난간을 잡고 안 놓으려고도 했으나 집에 가서 수영 가자는 말에 꽃은 곧 걸음을 재촉했다.




체력 천사


그렇다, 오늘은 동네 Rec center에서 수영 수업도 있는 날이다.


너무 피곤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제저녁 6시 반부터 아침 8시까지 푹 잔 데다 워낙 좋아하는 수영이니 해볼 만할 듯.


집에 오자마자 꽃은 한참 전 물려받은 Peppa pig 수영복을 입겠다고 외치더니 신나게 차를 타고 가서 신나게 수영 수업을 받았다.


머리를 자신 있게 잠글  있는 3세에서 5세를 위한 Alligator 반에 꽃과 사자를 동시에 등록했는데 수업받는 태도나 스킬 모든 면에서 꽃이 사자보다 낫다.


아직 39개월인 사자는 말을 듣지 않아서 남편이 풀에 들어가 있다가 수시로 사자를 유도하거나 안고 있어야 했다.


30분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춥다고 벌벌 떠는 사자와 달리 꽃은 레슨 후에도 몇 번이고 잠수 및 발차기를 하고 나서야 풀을 나선다.


끝나고 브리핑 때 수영 강사가 사자를 두고 “He maybe.. he maybe.. “라며 말끝을 흐리더니 결국엔 괜찮다고 해서 “You mean he maybe a lower level?” 직설적으로 물으니 그럴지도 모른단다.


우리는 여름 내내 꽃과 사자가 물에서 사는 걸 지켜봤기에 사자가 이 반 레벨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으나 어린 나이 + 사자의 성향상 하라는 데로 하지 않으니 강사에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꽃을 두고는 모든 자세를 잘 따라 한단다. 우리가 봐도 그렇다.


“Bye, swimming pool!” 손 흔드는 꽃에게 칭찬 멘트를 날려 주었다.


“You are alligator!

우리 집 체력 천사는 집에 와서도 멀쩡히 샤워하고 저녁 먹고 TV 보며 놀다가 평소 자는 시간에 곤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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