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동대문구 고산자로36길 3 청년몰 신관 지하 1층 「안동집」
매주 화요일이 기다려진다.
9월 셋째 주 화요일, Netflix에서 공개하여 12회차로 구성된 《흑백요리사 : 요리계급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달 17일 흑백요리사가 첫 공개되기 직전만 해도 「한식대첩」이나 「마스터셰프코리아」처럼 기존의 요리 경연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요리 서바이벌 예능 정도로 예상됐던 흑백요리사는 회차가 진행될수록 인물별 서사와 백수저를 제치는 흑수저의 반전 결말이 중첩되며 인기를 거듭하더니 무려 28개국 Top 10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젊은 세대의 소통 공간인 유튜브와 틱톡, 인스타그램 등에서는 안대를 쓴 채 감탄사를 내뱉는 백종원 심사위원의 성대모사와 "고기가 이븐(even ; 고르게)하게 익지 않았어요"라는 안성재 심사위원의 평은 이미 인터넷 밈(meme)으로 안착하였다.
미슐랭 스타 셰프와 이미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최고급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20인의 백수저 요리사들과 아직 그 같은 명성은 없지만 맛 하나만큼은 뒤지지 않을 실력의 흑수저 80인간의 선명한 흑백 대결 구도도 흥미롭지만, 이 구도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키워드는 셰프의 경력과 명성을 제한 채 안대를 쓰고 오로지 맛으로만 평가했던 「공정(公正)」이다.
공정한 경쟁은 결국 언더독(상대적 약자)의 서사로 집중되기 마련인데, 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전문 셰프들 사이에서 이모님 혹은 여사님으로 불리는 「급식대가 ; 본명 이미영」님과 「이모카세 ; 김미령」님이 <언더독 중에서도 언더독>이라 는 생각이 든다.
급식대가님은 흔히 먹을 수 있는 닭볶음탕이라는 요리로 국내 첫 미슐랭 1 스타 총괄셰프인 방기수 님의 오골계 찜국을 상대로 2:0이라는 승리를 얻어냈으며, 이모카세님 역시 마스터셰프 코리아 우승자이자 제주 모리노 아루요 오너셰프인 김승민 님을 2:0으로 꺾고 올라오신 데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식재료 중 하나인 캐비어를 압도하는 ‘구운 김’을 선보이셨을 정도로 요리 실력만큼은 이미 국내 최정상급으로 검증되었다고 본다.
급식대가님은 별도의 식당을 운영하지 않으시기에 이모카세님의 인생 요리인 안동국시를 경험할 수 있는 업장을 소개함으로써 그녀를 응원하고자 한다.
이모카세는 식당의 여사장님을 친근하게 부르는 '이모'와 맡김 상차림을 뜻하는 일본어인 '오마카세'의 합성어로 그날의 메뉴를 이모님께 일임하는 업장을 말한다.
그녀는 흑백요리사 초반부 소개에서 도봉구 창동의 「즐거운 술상」이라는 국내 이모카세 1호 식당의 주인장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 그녀의 첫 번째 식당은 경동시장 청년몰에 소재한 「안동집」이라는 국시집이다.
안동집은 1989년 개업하여 2대째 내려오고 있는 안동국시 전문점인데, 낮에는 이곳에서 음식을 하시다가 저녁에는 창동으로 넘어가 이모카세 업장을 운영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래도 콩가루가 들어간 국시와 배추전, 기장밥 등 안동집에서 취급하는 음식들은 지역색이 강한 향토음식이기에 서울에서 제대로 하는 곳이 그리 많지 않아 그나마 강남에서는 소호정, 강북에서는 정릉의 봉화묵집 등을 꼽을만하다.
지금이야 방송의 여파로 대기줄이 가게를 에워쌀 만큼 문전성시라지만, 본디 이 식당의 주된 손님은 경북 사투리 진하게 쓰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더랬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수육과 국시 한 그릇 청해 먹고 있노라면 각기 다른 테이블에 앉아 유년 시절 추억을 안주 삼아 막걸리 드시던 할아버지들이 사투리를 통해 동향임을 서로 알아차리시고 "어디 마을, 감나무댁 거기 아들 알아요?"라는 말로 말꼬를 트시곤 합석하는 걸 꽤 여러 번 봤더랬다.
그러고 보니 청량리역 인근 재래시장에 뜬금없이 안동의 누른 국시집이 자리 잡은 연유도, 콩가루 들어간 안동국시가 서울식 사골 육수 칼국수로 변화하지 않고 본래의 맛을 유지하는 이유도 궁금해졌다. 음식은 만들어내는 자와 먹는 이간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량리역 근처에 안동국시집이 자리 잡았다면 안동 사람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을만한 사연이 있을 테고, 그 원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안동국시를 즐기는 그룹 역시 이 지역에 모여 살고 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난 이 연유를《교통 편리성》이라고 추론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익숙한 것을 즐겨하고, 낯선 것을 멀리하는 법이고, 낯선 환경에서는 익숙한 것으로의 회귀 본능이 잠재되어 있다.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실향민들이 휴전선 근처 자리 잡아 마을을 이룬 「속초 아바이마을」이나 「강화 교동도 대룡마을」이 바로 그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과거 청량리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 무궁화호로 3시간 반 만에 안동에 닿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교통 편리성이 안동집의 누른 국시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경험한 음식은 수육, 배추전과 안동국시이다. 가성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민망할 만큼 음식이 주는 아우라에 비해 가격은 과거 어느 시점에 멈춰져 있다.
제대로 삶아내 잡내 없이 야들야들한 수육 한 접시가 겨우 12천 원이고, 국시와 비빔밥 등 식사류는 8천 원이다. 여기에 수육 곁들임 음식인 쌈배추와 새우젓, 된장 등이 나오는데 이만큼만 해도 벌써 한상 가득이다. 안동집에서 안동국시 외 반드시 먹어봐야 하는 음식은 바로 《배추전》이다. 경동시장에서 가장 좋은 최상급 배추로 만든 전은 심심하면서도 배추 특유의 단맛이 느껴져 끝도 없이 들어간다.
안동국시는 다른 지역의 잔치국수와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콩가루」라고 할 수 있다. 식당마다 조리법은 다르겠지만, 어느 곳에서는 진하기만 한 사골 국물에 콩가루의 존재감을 과하게 드러내며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진 경우를 목도했었는데, 재래시장에서 만난 이 집의 국시는 문헌으로 접하며 상상해 왔던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유생」이 떠오르는 그 맛에 가장 가깝다.
재래시장이라는 서민들의 공간에서, 수십 년째 동일한 메뉴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귀한 밥상을 받아보며 이모카세님이야말로 셰프라는 호칭을 넘어 '명인'이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