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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읏 Aug 04. 2021

모두가 가는 곳이라면 실패하지 않을 거란 믿음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남들 하는 거 다 해봐야지!


 저번의 여행에선 미술관과 박물관, 쇼핑 정도만 해서 영국의 특징적인 문화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여행 전에 계획을 짜려고 본 런던 여행 영상들은 공감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나름 유명한 곳들은 다 다녀왔는데 왜 진짜 영국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경험하지 못한 걸까?(심지어 영국박물관은 즐겁지도 않았다.) 이번 여행에선 영국에 다녀오는 사람들은 꼭 경험하는 문화를 다 체험하고  오겠다 다짐했다. 예를 들어 대표 음식 먹어보기, 빈티지 마켓 구경하기, 로컬 마켓에서 군것질하기, 추억이 될 기념품 사기 같은 것들 말이다.


남들 다 하는 것 중에 꼭 해보고픈 리스트

애프터눈 티 먹어보기

버로우 마켓에 가서 이것저것 사 먹기

주말에 열리는 마켓 다 돌기

유명 서점 에코백 사기


 이 날은 리스트 중 세 가지를 해결한 날이었다. 나의 계획은 일단 이랬다. 느지막이 나와서 셜록홈즈와 비틀즈 MD샵을 구경하고, 던트 북스 서점에 가서 에코백을 산 다음에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애프터눈 티를 먹기. 그리고 버로우 마켓에 가서 시장 구경을 하며 배를 실컷 채운 다음 코앞의 타워브릿지를 눈으로 훑으며 테이트 모던을 가기. 하고 싶은 게 많은 자에겐 불가능한 스케줄은 없다. 다 이루겠단 생각 하나로 일단 집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중에서 완벽하게 성공한 건 하나도 없다.



던트 북스뿐만 아니라 영국엔 다양하고 작은 서점들이 많았다. 우리가 구경한 곳은 두어 군대뿐이지만


 가장 먼저 시도했던 에코백은 던트 북스에서 하나, 나머지 하나는 다른 날 쇼디치에 있는 artwords bookshop에서 샀다. 잘 들고 다니고, 산 걸 후회하지도 않는데 실패했다고 하는 이유는 에코백을 사는데 들인 시간과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애초에 에코백이 목적이어서인지 시간을 오래 허비하면 안 될 거 같은 생각에 마음이 급해서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했을뿐더러, 들어가자마자 에코백이 걸려있어 결제부터 하다 보니 목적이 금방 소진되어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던트 북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라고 하는데 큰 감흥이 없고 남은 건 에코백 밖에 없는 걸 보면 그 장소가 너무 좋아서 기념으로 하나 사는 게 아닌 이상 에코백만을 위해서 애태울 필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코백은 에코백일 뿐 소중한 기념품은 되지 못했다.


월리스 컬렉션은 각 섹션마다 테마에 맞춰 룸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방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핫초코와 크림 티, 추천받은 애플파이 모두 맛있었다. 스프도 정말 맛있었는데 팝콘을 곁들여서 먹으라고 준건 진짜 천재 같았다. 모두 다 만족스러운 카페였다.


 그리고 애프터눈 티는 먹지 못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애프터눈 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가게가 아니라 월리스 컬렉션이라는 미술관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다. 후기를 찾아보니 카페도 예쁘고 나오는 것도 가성비 괜찮다길래 거기서 먹기로 했는데 시간을 잘못 맞춰 간 것이다. 2시인가 3시부터 판매를 시작하는데 숙소에서 가장 가까워 먼저 들렸던 미술관에서 세시 이상까지 시간을 보내기엔 우리의 일정이 너무 빠듯했다. 하지만 서점처럼 기념품 말고 다른 건 다 실패했다는 느낌이 든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애프터눈 티 하나만 보고 간 미술관이라 메뉴에 대한 후기 밖에 안 봤는데 전시품이 생각보다 유명한 게 많고 퀄리티가 뛰어났다. 램브란트의 자화상부터 로코코 대표 그림으로 배웠던 것들도 있고, 각 방마다 테마도 있어 엄청나게 화려한 게 건물만 구경해도 눈이 돌아갔다. 안 가봤지만 베르사유 궁전이 딱 이런 느낌일까? 호화스러움과 고풍스러움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이게 다 개인 수집품이라니. 대충 구경하려 했는데 도슨트 뒤에서 몰래 듣기도 하고 꽤 제대로 구경했다.


 카페 역시 전시공간의 연장선상 같은 느낌이었다.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홀을 미니 온실과 하나의 테마가 있는 전시장 & 카페로 꾸며놨는데, 마치 어떤 공작의 집에 초대되어 온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는 거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비록 애프터눈 티는 시킬 수 없었지만 다른 메뉴를 이것저것 시켰는데 시킨 메뉴(크림 티와 핫초코, 파이, 스프) 모두 맛있었다. 런던은 지독한 고전과 모던이 크로스 오버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이 장소가 딱 전자의 느낌이었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이루지 못했지만 의외로 좋은 기억만 남은 장소였다.





 주말에 열리는 마켓은 이 날에 간 게 아니라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날짜를 잘못 맞춰 간 건지 좀 휑한 때가 있었다. 나름 힙플레이스들인데 갈 때마다 사람도 연 곳도 생각보다 적은 느낌? 뭐 아무튼. 마지막 리스트의 일정이었던 버로우 마켓은 개인적으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장소였다. 내가 생각하는 시장의 의미와도 맞았고 온갖 방송과 브이로그에서 먹을 것이 많다고 정보를 엄청 습득해뒀다. 그게 문제였을까? 영국 음식이 내 입맛엔 영 맞지 않았다.(전에도 호되게 당했는데 여긴 다르겠지 막연하게 믿었다.) 먼저 플랫화이트로 유명한 몬모스 커피를 한잔 사 먹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잘 만든 라떼보다 맛있는지는 모르겠고, 맛있다고 추천이 있었던 the ginger pig의 소세지롤 역시 너무 지름 지고 느끼해서 크지도 않은 걸 다 먹지 못했다. 이 외에 줄이 길었던 곳에서 빠에야 등 몇 가지를 더 사 먹어 봤지만 간이 너무 세서 얼마 못 먹고 버렸는데 실패가 몇 번 있고 나니 다른 음식에 대한 기대가 점점 사라졌다. 진짜 궁금한 게 영국은 염장하는 지역도 아닌 줄 아는데 도대체 왜 먹는 것마다 다 소태 같을까? 마켓 자체는 런던의 부엌이라고 불리는 것만큼 다양한 식재료와 식품들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다. 하지만 먹는 것을 기대하고 간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첫 여행에서 남은 아쉬움을 해결하고자 계획을 열심히 짰지만 더 잘 즐길 수 있었는데 같은 아쉬움만 더 생겼다. 다녀온 사람들이 모두 하는 이야기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욱여넣은 계획은 내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했다. 여행은 숙제 검사가 아닌데 말이다. 조바심이 날수록 그것이 내게 가져다준 실망감은 더 컸다.(물론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고 의외로 성공한 점도 있지만) 남들이 다 하는 것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자격지심은 내게 독 밖에 되지 못함을 이 여행을 통해 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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