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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나 Jun 14. 2021

한 사람의 마지막을 들여다본다는 것

로베르트 슈만; 그의 죽음에 대해

   프롤로그를 먼저 쓰고 싶었는데, 지금 너무 생각나는 것이 있어 먼저 급히 글을 쓴다. 책을 열자마자 나오는 것이 본문이고, 그 다음 프롤로그가 나온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요 며칠간 계속해서 생각하고 고심했던 것이기에,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에서 빠르게 써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미래의 내가, 급히 써내려간 이 글 때문에 이불킥을 하게 될지언정 나는 지금 이 말을 너무 하고 싶다.


로베르트 슈만; 그의 죽음에 대해


   자.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이라는 단어가 주어졌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는가? 브람스, 클라라 슈만, 정신병원, 낭만, 작곡가... 훌륭하다. 이 정도 생각들이면 된다.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정신병의 악화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비극의 작곡가. 아주 좋다. 그러나 나는 또다른 의문을 던진다. 그의 정신병은 왜 악화되었는가?

   라인 강에서 투신해 자살 시도를 한 슈만.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슈만은 자발적으로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극도의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슈만은, 다행히도 정신치료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알고 싶었고, 고통 자체를 제거하기보다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신병원으로 행한 것이다. 자신의 가족을 해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붙잡았던 정신병원이라는 끈을 차마 잡지도 놓지도 못한 채, 그는 그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슈만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책인 '슈만, 내면의 풍경'에서는 고통을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고통의 원인은 결국 자기 자신인 것이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제거한다는 것인데, 슈만은 이를 몰랐다. 어려운 문장이지만, 슈만의 죽음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슈만이 입원했던 정신병원은 의도치 않게 슈만이 자기 자신을 제거하게 했기 때문이다.

   엔데니히에 위치한 병원의 의사 리하르츠는 꽤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19세기의 정신병원은 '치료'의 개념보다는 사회에서 정신병 환자를 '격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시작으로 '치료'개념이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리하르츠는 이를 받아들여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하고자 했다. 정신과 치료에 개방적이었던 슈만은 다양한 정보 수집 끝에 엔데니히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리하르츠는 슈만에게, '그를 자극하는 모든 것과 격리'하는 처방을 내린다. 슈만은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와의 면회도, 그가 온 힘을 바쳤던 작곡활동도 할 수 없었다. 리하르츠에게 클라라와 작곡 활동은 모두 슈만을 자극하는 행위였고, 결국 그로 인해 슈만의 자살사고가 활발해질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자. 전전 문단의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어구를 다시 떠올려 보자. 슈만의 인생이었던 클라라와 음악이 제거되었다. 그럼 슈만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물론 그의 제자 브람스와 친구 요하임이 그를 몇 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긴 했다. 그러나 슈만은 점점 자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슈만은 그가 다시는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렵게 쟁취한 클라라와의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해 활발해진 음악 활동.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슈만의 질환이 더욱 심각해지는 건 시간 문제 아니겠는가. 실제로 슈만은 병원을 옮길 것을 수차례 요청했다. 브람스가 다른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한 사람의 마지막을 들여다본다는 것


   슈만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가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도 불분명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글에서 다루었던 것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정확히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말에 대해 다루고 싶었을까?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유다. 비단 슈만뿐이겠는가. 다른 작곡가도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면 숨겨진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슈만은 유난히 비밀이 많다. 기록도 참 많지만 비밀도 참 많은 이 아이러니한 작곡가.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슈만은 조현병 환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 음악 평론에서도(요즘은 조금 덜하지만)슈만의 후기 음악에 대해 '학생의 습작 같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반박하고 싶다. 그의 후기 음악에 숨겨진 그의 심정을 밝혀내고 싶다. 그리고, 조현병 환자라는 이미지에 덮인 슈만의 다양한 모습을 알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질환과 마지막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지막을 공부한다. 이것이 쉽지만은 않다. 때로는 그의 아픔이 내게도 전해진다. 자료나 책을 읽다 울컥하기도 하고, 너무 아픈 마음에 문헌을 덮은 적도 많다. 브람스가 슈만을 기리며 작곡한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내가 못 듣는 음악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를 앞지르는 것이 일관적인 슈만에 대한 태도를 반박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 또 공부한다.

   '마지막', '정신병원'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뉘앙스 속에서 나는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그 부정적 뉘앙스를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그 안의 사람은 참으로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사람이기에. 가장 부정적이지만 또 가장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 않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슈만에 대해 다시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만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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