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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노을 Nov 11. 2021

엄마의 파스 냄새

어릴 때  기억중,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이 제일 생각난다.

  위로 언니 둘, 오빠, 나, 남동생, 이남 삼녀 중, 난 셋째 딸이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한때는 세상 부러울게 없이 살다가, 한때는 식구가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굴곡이 심했다.

무수한 풍파 속에서도 엄마의 음식은 늘 풍요로웠다. 생고등어를 굵은소금을 쳐서 하롯 불에 구워서 주기도 했고,

독이 있어 어렵다는 복어 국도 아버지가 좋아하셨어, 자주 해주셨다.

겨울이면 시루떡을 장독에 넣어, 긴 밤 우리가 배고파하면 간식으로 주셨고,

팥도 직접 끓여서 팥 찐빵을 만들어 간식으로 먹기도 했.

제일 생각나는 건, 동를 아가미는 젓갈 담고, 내장과 대가리는 시원한 동탯국을 끓여 주셨고, 몸통은 바람에 말려 반건조 상태로 칼질을 해서, 회처럼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둘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이 있었다.

긴 겨울밤 식구들이 엄마 주변에 둘러앉아, 도마 위에 반건조 명태 몇 마리를 손질해서, 첫 시식은 제일 맛있는 부위를 큰언니보다, 항상 오빠 입에 초장 잔뜩 찍어 입에 넣어주고, 그다음 큰언니, 작은언니, 나 , 남동생. 내 차례는 왜 그리 더디게 돌아오는지~~

 철없는 우리는, 엄마는 안 먹어도 되는 줄 알고, 우리는 서로 자기 차례만 기다며 빨리 손질하길 재촉했다.

청각 초무침도 단골 메뉴고,

귀한 김은 꼭 개수를 세어서 골고루 나눠주면서, 항상 오빠는 우리보다 몇 장을 더 주셨다. 누구도 그 부분에 저항은 없었다.  

장남인 오빠는 아버지 다음으로 모든 것에 우선순위였다.

자라면서 엄마 아버지가 소소하게 말다툼하고 크게 몇 번 싸운 것 말고는, 

 엄마 아버지는 서로를 위하며 정스럽게 사셨다.

 큰방에 다 같이 잘 때도, 자다가 소변보러 일어나 보면, 아버지는 엄마를 안고 계셨다.  사랑받는 엄마라서 그런지, 아버지에게 잘하셨고, 정말 형편이 안 좋을 때

김치에 콩나물 넣고, 쌀은 조금 넣어 죽을 만들 때도, 파를 잔뜩 넣고 맛깔나게 끓여주셔서, 이 부족해서 하는 줄 모르고 늘 맛있게 먹었다.

식구 중에 나만, 내 생일이 되면 내 친구를 불러, 상다리 휘어지게 음식을 차려주신 우리 엄마!!

아직도 내 친구들은 어릴 때 먹은 우리 집 반찬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만 유독,

잘 살 때나 못 살 때나, 늘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온 것 같다. 그런 셋째 딸에게 은근 기대를 많이 한 것도 같았다.

 고2 때,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 갔는데, 급성 간암으로 며칠 못 산다고 집으로 모셔가라고 했다. 3일앓다가 초파일 저녁, 군대 간 오빠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왔는데 , 오빠 얼굴 보고, 말 한마디 못 한채 운명하셨다.

 그때도 엄마의 슬모습은 잘 보질 못했다.  결혼 안 한, 아이 다섯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엄마의 모습만 봤다.

그렇게 강하던 엄마가 큰아들이 결혼하면서, 사주를 봤는데, 아들과 같이 살면 아들이 죽는다고 했단다.

엄마는 믿을 수가 없어서, 몇 군데를 다니면서 봤는데 똑같은 애기를 들어서 오빠한테 따로 살자고 했다. 오빠는 크게 화를 내면서, 아버지도 안 계신데 내가 엄마를 안 모시면, 결혼 안 하겠다고 했다. 너무나 강경한 아들 때문에 불안했지만 속으로는 좋았다고 한다. 효자중에 효자였다. 혼해서 오빠는 첫딸과 둘째 아들 고, 셋째 딸이 배속에 있을 때,

추석에 아버지 산소 성묘 갔다가, 갑자기 오빠가 쓰러졌다.

그때 나이 서른넷이다.

너무나 건강했든 오빠였는데,

쓰러진 오빠를  대학 병원에 데려갔는데, 급성 백혈병이라 길어도 삼 개월밖에 못 산다는 청천 병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수혈을 했어라도 오빠를  싶었다.

 하지만 오빠는 수혈을 한다 해도, 잠시 연장할 뿐이니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퇴원하기를 원했다.

병원비 때문에 재산만 날리고, 노모와 자식이 살아야 할 집마저도 없앨 순 없다고 했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올케 언니도 임신 중이라 충격이 컸고, 무엇보다 엄마의 절망적인 슬픔이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오빠는 의외로 담담해했다.

그래서 더 슬펐다.

쓰러지고 한 달도 못살고 음력 구월구일에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엄마의 인생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고, 그렇게 맛깔나든 음식 솜씨는 맛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저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일 뿐이었다.

아들이 우겼어도,

절대로 같이 살지 말았어야 했다고,

늘 우셨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엄마 스스로 자신에게 가혹하게 벌을 주며 사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늘 장사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든 우리 엄마,

달라진 건 우리 엄마 허리에 다리에 어깨에 늘 파스를 붙이셨다. 손이  않는 곳은 우리에게 붙여 달라 하시든 엄마.

 아버지가 안 계신 엄마 옆에는 늘 파스 냄새가 났다. 그래도 늘 씩씩하셨다.

 그런데 오빠를 묻고 나서,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는 엄마를 통해 절절히 알아버렸다.

엄마 돌아가신 지 5년이 다되어 간다.

지금도 한이 되는 건, 난 일한다고  엄마 아플 때 자주 보지도 못했고,

 유언으로, 엄마가 죽으면 화장해서 물 좋은 곳에 뿌려달라고 간곡하게 원했다고 한다.

 아들 죽인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사신 엄마는, 죽어서 당신의 흔적마저도 남기지 않으려고 그렇게 떠가 가셨다.

만약 내가 돈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허무하게 흔적 없이 보내진 않았을 거다.

 엄마 살아생전 가지고 계신돈은, 전부 나에게 빌려 주셨다. 가 힘들어할까 봐  한 번도 돈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가족들 한테도 죄인이었기에,

 엄마 납골당이라도 모시자고 말 못 했다.

그렇게 가슴에 한이 남는데,

작년에  아버지 산소자리가 안 좋다고 묘지를 없애고 화장을 했다. 나는 가지 못했는데,

 그날 밤 목놓아 울었다. 세상 어디에도 내 아버지 내 엄마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가슴을 치면서 울었다.

내 평생 그렇게 서럽게 울기는 처음인 것 같다.

세 아들에게 미리 유언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해서 납골당 도자기에. 내 아버지 누구, 내 엄마 누구, 내 오빠 누구라고 반드시 기록해달라고 부탁했다. 내 마음을 아는 세 아들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요즘 나한테 내 엄마 냄새가 난다.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는 날이 늘어난다.

난 내 엄마 냄새 같아서 파스가 좋다.


이런 기록들이,

 내게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아버지 내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먼 훗날 내 손주 손녀에게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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