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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고래 Apr 04. 2023

비무장지대 케렌시아

따뜻한 솜털을 닮은 갈색


엄마 : 적금 들었어.

아들 : 적금 뭐야?

엄마 : 월 85,000원, 1년 지나면 100만 원 모이는 거로 용돈계좌에서 이체되는 거야.

아들 : 근데 85,000원✕12개월은 1,020,000원인데?

엄마 : 모자라는 것보다 낫지

아들 : 그러니까 적금을 들 이유가 있냐고?

엄마 : 왜?

아들 : 2만 원 손해잖아

엄마 : 1,020,000원+이자

아들 : 이자 얼마 나오는데?

엄마 : 1.5%

아들 : 그럼 1,000,000원+1.5%(15,000원) 이면 5,000원 손해야?

엄마 : 네가 50,000원, 내가 35,000원, 원금 1,020,000+이자!

아들 : 아니, 원금이 1,000,000원이라며

엄마 : 히히히

아들 : 월에 50,000원씩 빠져나가는 거?

엄마 : 네 통장에 엄마가 35,000원 넣으면, 85,000원 적금으로 자동이체

아들 : 크크크

엄마 : 공부 시간 아니야?

아들 : 공부 안 함

엄마 : 그럼 뭐 해?

아들 : 그냥 아무것도 안 해

엄마 : 책이라도 봐. 점심 맛있게 먹어      


 아들과 카톡 대화 내용을 얘기하던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의 경제관념이 이랬다. 부모가 주는 용돈을 넙죽넙죽 받아 쓸 줄만 알았지 적금이 어떤 개념인지 몰랐던 아이, 여기서 우리 때는 안 그랬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그 말은 우리가 지금 늙었다는 뜻이었다. 젊은 세대가 이름 붙인 꼰대가 되었다.     

‘나 때는 말이야’를 쓰면 젊은 세대는 귀부터 막으려고 한다. 그때하고 지금과 상황이 똑같으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그래도 쓴다. 나 때는 그랬다고.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모을까? 매달 받는 용돈, 설날 세뱃돈, 친척들이 집에 다녀가시며 지폐라도 쥐여주면 되지 저금통에 넣기 바빴다. 시대적으로 나라에서 저축을 장려하기도 했고 먹고살기 힘들었던 부모의 경제관념은 저축이 최선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요즘 아이들은 용돈을 카드로 쓴다. 핸드폰에서 가벼운 터치만으로 결제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돼지저금통에 동전과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저금하던 재미를 알까? 세상은 매우 편해지고 있지만  이런 시스템이 너무 삭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다 급하게 버스를 탔는데 교통카드를 두고 나와 난감해하던 기억이 있다. 핸드폰으로 결제하는 방법을 딸이 알려주었는데 어느 화면에서 터치하는지 몰라서 쩔쩔매다가 버스 기사 앞에서 눈총만 샀다. 

 기업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속에서 어느 만큼을 취하고 버릴지에 대한 기준은 자신에게 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면 생활에 제약이 따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상황도 있다. 현금이 사라지고 카드가 대체수단이 되면서부터 씀씀이에 대한 개념도 많이 바뀌었다. 생활의 편리함을 얻는 대신 경제적인 부담도 늘었다.    

  

 세상이 천천히 변했으면 좋겠다. 급박하게 변해가는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벅차다.  아직도 아날로그적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련함이 원인일 수도 있다. 의식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수준에 몸만 현대를 살고 있는 부작용이라고 할까?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숨이 찰 때가 있다. 그래서 나 때는 말이야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때가 있다. 나이 든 세대는 이 말을 쓰고 싶어 하고 젊은 세대는 이 말에 진저리를 친다. 이러한 시대의 아이러니가 씁쓸했다.  


 100세 인생이라고 한다. 그중에 딱 중간쯤에 끼인 나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하나? 

사실 나는 어느 쪽에도 끼이고 싶지는 않다. 그런 시대의 논리 말고 나는 그대로나 이어야 하니까.      


 케렌시아는 스페인어로 안식처를 뜻하는 말이다. 투우사와 싸움 중에 소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영역이다. 이곳은 경기장 안에 확실히 정해진 공간이 아니라 투우 경기 중에 소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피난처로 삼은 곳이다. 투우사는 케렌시아 안에 있는 소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요즘에는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또는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스스로 케렌시아 세대라고 이름 붙였다. 다른 세대가 비겁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그 세대에서 씩씩하게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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