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하고도 3개월 만인데 기억이 날까..?
늦여름이라고 불러야 했던 좀 더웠던 가을.
언젠가 유튜브에서 본 80년대 홍수도 뚫고 어떻게든 출근하시던 우리네 선배님들과 같은 열정이 나에게도 있었나 보다. 코로나와 태풍(힌남노)도 나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난 한 시간이나 빨리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그날의 열정 반만이라도 있었으면..)
하루에 약속 2탕 이상은 기본으로 달렸었다. 나의 금 같은 한국에서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며, 약속과 약속 사이의 빈 시간엔 열심히 혼자 놀아보았다.
한강에서 자전거 타기와 한강라면 먹기가 꽤 오랜 기간 동안 나의 whish list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전거 타기는 성공했지만.. 라면은 배가 너무 불러서 먹지 못 했다. 냄새 만이라도 맡았으니 괜찮다.
어림잡아 16-17년 만의 자전거 타기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처음엔 너무 오랜만이라 넘어질까 무서웠는데 인증샷을 남기겠다며 한 손엔 핸들,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 달리는 날 발견 할 수 있었다. 이날 내 허벅지는 터질 듯 불타올랐지만 자전거 타기에 빠져 아픔도 잊은 채 대여시간 1시간 동안 풀 논스톱으로 달렸더랬다.
많은 친구들을 한국으로 떠나보내며 미국에서의 인연들을 다시 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들과의 이별이 더 슬펐던 이유는 항상 남겨지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고맙게도 그들을 다시 만나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린 학생이었고 그저 편한 동네 언니, 동생이었는데 어느새 번듯한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가을이었지만 한여름 날씨인 덕분에 부츠 속 내 다리엔 정말 오랜만에 (거의 13년?) 땀띠가 났다. 항상 내가 먼저 비켜주던 좁은 길에선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 주게 만드는 든든한 언니 같은 동생 덕분에 난 오랜만에 쫄지 않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다. 하루종일 그 핫한 혜화 대학로를 검은 봉지와 함께 누비다 결국 난 참 마음에 드는 인생 네 컷 두장과 검은 봉지를 함께 잃어버렸다.
한국 여행 내내 메고 다녔던 나의 핑크 애착가방, 이젠 사진으로만 남은 사진, 그리고 검은 봉지..
15년 만에 돌아온 친구에게 민주는 특별한 것을 보여주고 싶었었나 보다. 민주네 집 앞 천일홍 축제엔 비록 천일홍이 피기 전이었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 좋았다. (꽃이 만개하기 전이라 좀 이른 감이 있었다.)
내 기억 속, 자칭 꽃동산이라 부르던 고향의 어느 코스모스가 만개했던 길이 항상 그리웠다. 그리고 여기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를 보며 그 그리움으로 비어있던 칸을 채울 수 있었다. 다시 이곳이 그리워지겠지 생각하니 코 끝이 살짝 찡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민주와 했던 여행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아파도 마지막까지 잘 놀아보겠다며 주사 맞고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던 우리다(약 먹을 시간이야!).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너무 귀엽고 웃기다.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 다 해보게 해 주겠다던 민주의 노력이 고마웠고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맙다!
나의 로망이던 교복 입고 롯데월드 가기, 한복 입고 경복궁 가기를 덕분에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30년 전후 비교샷을 만들어 보내주며 60대가 되어도 우린 똑같을 거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백 퍼센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음 만은 항상 소녀니까!
신병 훈련기간 동안 이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머금곤 했다. 마음 만은 소녀지만…
그리고 오빠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외국인이니? 외국인하는 것만 하고 다니네!
그리고 난 대답했다. 나 외국인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