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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석 Jan 16. 2022

감옥에서 탄생한 명필

유시민, 《항소이유서》

몇 년 전에 방영된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몇 주 전까지는 유튜브에서 짧은 영상으로 접해왔는데, 출연자들 - 프로그램 안에서 부르기로는 '잡학박사들' - 이 여행을 떠나고 이를 토대로 사회, 정치, 역사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반에 대해 지식을 방출하고 의견을 나누는 토론의 장이 꽤나 흥미로웠다.


어느 한 회차에서, 출연자들은 유시민이 20대에 쓴 《항소이유서》를 언급하며 그것이 얼마나 명필이며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누군가 재밌다고 언급한 책이나 이야기는 안 보고는 못 참기 때문에 개괄적인 내용이라도 훑어보고자 인터넷에서 전문을 찾아내 읽어보기 시작했다. 본래에는 서론의 몇 문단과 결론의 몇 문단만 읽으며 인상적인 문구나 전체적인 흐름만 짚어보려고 했는데, 서론의 필력과 흥미로움에 매료되어 한 문단, 두 문단, 쭉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쉼 없이 계속 읽다 보니 결국 그 긴 글을 한 번에 다 읽게 되었다. '항소에 대한 이유'라는 고리타분한 주제임에도, 필자가 겪어보지 못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완독을 마쳤다.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 감성 후 기록을 남길 겸 이 글을 소개하기로 결심하였다.




내용 정리


글의 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건에 대한 정의, 국가의 저의와 모순, 항소의 근거와 해명.


첫 부분에서는 이 사건이 어떠한 경위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먼저 아래와 같은 소위 한줄요약으로 사건을 정의하며 서두를 뗀다.

‘정권과 학원 간의 상호 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

그 이후에는 '학원과 정권의 대립' 그리고 '가짜학생'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을 전개한다. 학원과 정권이 왜 대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늘어놓으며 그 간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설명한 다음, 이로부터 비롯된 '가짜학생'이라는 존재가 학원 내부에서 어떻게 혐오를 불러왔고 그것이 어떤 파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사건에 있어 국가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들의 저의와 모순점들을 지적한다. 누명을 쓰게 된 것에 대해 1)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를 이용한 대표성, 2) 모의를 통해 조직적으로 계획되었다는 비우연성 을 국가가 활용하고자 하였고, 그 표적으로 본인을 포함한 학생들이 지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이것이 선례가 없는 일이 아님을 지적하며 그동안의 일을 늘어놓고, 이를 통해 경찰의 공권력 행사에 있어서의 모순과 사법부가 주장하는 편향적인 정의를 꼬집는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본인이 왜 무고한는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판결문의 내용을 하나씩 언급하며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과 어떠한 대척점에 있는지, 어떠한 측면에서 어불성설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든다. 공문에 근거한 이성적인 추론을 끝마친 이후에는, 본인의 삶을 돌아보고 가치관을 살펴보았을 때 본인은 절대 이런 사건에 휘말릴 수 없음을 주장하기 위한 감성적인 추론을 펼친다. 그러고는 자신의 국가에 대한 사랑을 담아낸 네크라소프의 어구,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를 마지막으로 글을 끝마친다.


글의 내용을 압축하기 위해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지만, 실제로는 세세한 내용이 많을뿐더러 문체의 특유한 분위기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내용이 있다. 때문에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전문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 전문 링크 =>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




인상 깊게 읽은 이유


내용만 살펴보면 이 글이 왜 인상적인지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먼저 이것이 쓰여질 당시의 유시민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항소이유서는 말 그대로 판결이 난 이후에 그것에 대해 반박하고자 재심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되는 문서이다. 그 말인즉슨 이 글을 쓸 당시에는 판결을 통해 형량이 확정되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이었다. 감옥이라는 통제된 환경 속에서는 신체 또한 속박된 상태이기에 아무리 자유로운 정신이라 해도 그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테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감옥 내부 사정을 짐작하자면 구타를 비롯한 여러 가혹 행위가 존재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여러 강압과 결핍 속에서 생각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한 시간 또한 무제한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감방 안에서는 작성할 수가 없고 교도관의 감독 하에서만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시간이 충분하기 않았기에 감방 안에서 흐름과 소재 그리고 각 문장에 대해 구상해내며 그것을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아 놓았고, 원고지가 앞에 놓이면 그것들을 대방출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글쓰기 환경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그 속에서 이 글이 탄생하였다는 점이 여타 글과 다르게 더욱 인상 깊게 남은 이유이다.



이제 글 자체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서두이다. 내용을 요약할 때 언급이 안 되었던 부분인데, 여기서는 자신이 이 글을 단순히 항소하기 위해 작성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힌다. 이 사건의 주안점인 폭력행위란 결국 사회의 현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을 분석하고 들추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피고인으로서 작성하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항소이유서가 아닌, 한 국민으로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청원하는 일종의 '신문고 두드리기'라는 점을 재차 강조한다. 이는 글의 거부감을 줄이는 데에도 일조하는데, '자신의 누명을 벗기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진 반박하는 글이지만 그것을  '국가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발전에 대한 제언'이라는 목적으로 가려버린다.


앞서 언급한 이것이 쓰일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감정이 잘 억제된 글이라는 점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수감되면 누구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쓰인 항소이유서라면 그런 감정의 흔적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히려 불필요한 감성의 요소를 스스로 정제해내며 원고지에 감정이 묻어나지 않게 하였다. 그 거름망은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최소한의 이성적 내용만 담겨있는 간결한 읍소문을 뽑을 수 있었다. 만일 감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 글은 알려지지도 못했을 테다. 아마 이 부분이 이 글이 명필로 평가받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깔끔한 구조도 인상적이었다. 앞선 내용 정리에서 적었듯, 이 글은 다루어지는 사건을 기초부터 정의하면서 시작하며 그 위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정의를 세세하게 분배하며 내용을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각 사건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연대기와 함께 인과관계까지 덧붙여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찬찬히 설명했다. 주장을 서술할 때는 시작하는 말과 끝맺는 말이 분명하여 주장 사이의 전환이 부드러웠다. 필자의 경우에는 글의 길이에 겁먹지 않고 세심히 읽어나가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구조의 관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양심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이 글은 서두에 다음과 같은 전제를 적어놓았다.

[...]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신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어구라고 생각했지만, 이 부분은 곧 '가짜학생'의 모순에 대해 지적할 때 다시 등장한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수미상관의 구조는 마치 독서를 추리게임에 빗대어 생각하게 하여 글에 대한 기대와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또한 그 이후에도 양심에 대해 추가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가치관이 양심임을 읽는 사람의 생각에 내재시킨다.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치밀한 구조를 구성하고, 글의 신뢰성이 향상될 수 있는 효과도 지니게 하였다.


이 외에도 직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우화를 통한 비유, 국가와 윤리와 법에 대한 본인의 철학/가치관과 현상의 적절한 조화, 내용에 토핑처럼 곁들여지는 여러 지식들 또한 글을 더욱 인상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던 요소이다.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글 자체와 왜 인상적이었는지에 대해 주요하게 적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그보다 당시의 시대적 정신과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인상적인 부분으로 다가왔다. 교과서나 여러 매체에서 여러 항쟁들이 어떻게 촉발되었고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익히 듣지만, 시대적 정신에 대해서는 쉽게 체감할 수 없었다. 주로 인과관계만 다루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굵직한 사건들만 다루는 탓에 그 사이에 일어난 여러 사소한 사건을 통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려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굵직한 사건들이 아닌 이야기를 다룬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와닿을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나 같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서, 교육을 위해 존재해야 할 대학이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어 갔으며 교육을 받아야 할 학생들이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기 위해 교육을 포기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했다는 점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동시에 지금의 시대적 상황과 학교에서 학생답게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한 때는 당연하지 않았음을,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필연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전문을 읽으며 위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는 읽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쓰인 글이기에 그만큼 해석은 읽는 사람의 몫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고 넘기기보다 전문을 한 번쯤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특히나 법과 관련된 전문을 읽어보는 것은 흔치 않기에, 이번 기회에 한 번쯤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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