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주머니가 한데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급생을 칼로 찔러 교도소에서 복역하였으며, 소설을 써 내려간 남자. 남자에게 찔린 아이의 엄마로, 남자를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매달리는 아주머니. 소설 공모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된 동창인 남자와 함께 다니며 평범한 출판사를 직장으로 삼고 있는 여자.
소재의 특성이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의 소재라고 생각할 때는 평범하다고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물론, 우주를 유영하며 흥미로운 패턴을 찾아다니는 '우주알'이라는 존재가 등장하여 이야기의 SF적 요소를 가미한다. 남자 속에 스며들어 소설을 쓰게 하고 이를 통해 여자와 남자가 만나게 하는가 하며, 시간의 축을 자유롭게 오간다는 '우주알'의 특징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흥미롭게 이끌어 나간다는 독특한 요소가 존재한다.
적당하게 무난하면서도 독특한 소재에 더해, 깔끔한 문체가 가독성을 높인다. 큰 따옴표를 쓰지 않았음에도,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분석할 필요 없이 인물들 간의 대화를 간결하고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또한 세 개의 단어로 써 내려간 제목들은 깔끔함을 한 층 더 깊게 만들어준다. 소재나 내용의 다가오는 정도가 필자와는 잘 맞지 않지만, 글을 읽어감에 있어서는 막힘 없이 꽤나 술술 내려간 책이었다.
책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단어들이 나온다.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단어인 '패턴', 책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는 남자의 살인사건과 아주머니의 행동으로부터 바라본 '속죄와 용서',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 등. 등장 빈도와 비중을 보았을 때 충분히 의미가 담겨있는 듯하고, 여러 평론에서도 이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느꼈다는 의미에 대해서 필자는 큰 의미를 뽑아낼 수 없었다. 대신 작가의 의도한 내용은 아닐 것 같은, 다소 엉뚱한 부분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뽑아내 책을 읽고 나서의 생각을 적어두고자 한다.
'진실'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진실의 경계가 흐려진다.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남자가 동급생을 찌른 사건으로 채워진다. 시작부터 흐름을 따라가면, 남자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고 칼을 휘두른 행위는 지속적인 폭력으로 인해 축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행동으로 정당방위의 여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며 아들의 무고함과 남자의 죄질이 더 무겁다는 주장을 하는 아집 가득한 사람으로 비친다. 남자의 설명, 법원의 판결, 주변의 증언, 그리고 아주머니의 행동까지 이 하나의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책의 끝에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닌 사실, 그것도 거짓인 사실로 밝혀진다. 남자는 영상에서 학교폭력은 모두 거짓이었으며 자신의 행위에는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있는 일말의 틈도 없다며 인정한다. 어떠한 증거 없이 말 뿐인 남자의 음성이었지만, 그것은 책 전체를 읽으며 굳건하게 믿었던 독자의 입장에서 혼란을 줄 만하다.
여자 또한 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현상을 겪는다. 여자는 엄마의 안구가 돌출되었다며 걱정을 토로한 것이 건강에 대한 과도한 걱정이며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중학교 때의 작은 보람과 큰 보람에 밀려 자신은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을 괴롭히던 <시간여행자와 역사도둑>의 작가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회사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남자가 떠난 뒤 어떻게 되었나. 엄마의 안구 돌출은 갑상선 기능의 저하로 인한 증상이었으며, 중학교 때의 큰 보람은 되려 여자에게 콤플렉스를 느껴 도피성으로 영국 유학을 떠났었고, <시간여행자와 역사도둑>의 작가는 여자의 피드백이 기분이 나쁘면서도 굉장히 일리 있다며 진심 가득한 칭찬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야기 속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이 변해나가는 것을 보며, 진실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진실이란 정말로 존재한 것일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가지는 함의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책의 제목을 통해 확장해볼 수 있다.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기억에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는 하나의 일률적인 기준 아래에서 세계를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같은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세상이 그러했다면, 민주주의에서의 투표는 몰표로 무의미해지고, 전쟁과 정치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사소한 다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에 갈등과 대립, 고집과 아집을 품고 있다.
그 차이의 원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주체가 '당신'이라는 점으로 귀결된다.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는 '당신'이고 그 세계 속에서 행동하는 주체 또한 '당신'이다. 모두 '당신'의 입장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세계는 70억 개의 '당신'이 만들어낸 70억 개의 '당신만의 방식'으로 채워진다. 진리의 존재성에 대한 질문을 차치하고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70억 개의 '당신만의 방식'은 그 진리를 70억 가지로 해석하게 된다. 우연하게 한두 개의 방식이 욕조 위 거품 마냥 자연스럽게 합쳐지겠지만, 모든 거품이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듯 전체가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진리의 의의는 무엇일까?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는데 그마저도 일률적이지 않아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면, 진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그 상황에서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하는 사실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가 중요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리는 그저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당신들'이 '방식'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울 좋은 허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진리가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나- 라는 반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다른 말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짓는, 지금 눈앞의 색안경에 의존해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필자 개인의 생각을 담아내자면, 질문에 담겨있는 비관적인 태도보다는 진취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답하고 싶다. 설명을 더해보자면, 우리는 각자가 착용하고 있는 색안경 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라보았을 때 보이는 진리, 정확히는 진리라고 보이는 것을 하나씩 가진다. 물론 그것이 보편적이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리는 아니라는 점에서 회의론이 발생하는데, 그 감정을 도전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과연 다른 색안경을 쓴 사람은 어떤 것을 진리로 볼까?", "진정한 진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진정한 진리에 가까운 여러 후보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가지며 하나씩 탐색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색안경을 써보려고 하며 그들만의 방식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색안경의 컬렉션,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방식의 묶음을 구축하여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확장해야 한다.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면, 진리의 근처에 가보는 것.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뒤에 앉아있기보다는 앞에서 일어나 있는 태도를 가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