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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하 Apr 04. 2024

창고 안에 깃든 한 줄기 햇살처럼


나는 참 덤덤한 사람이다. 천성인 건지 아니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터득한 건지, 아니면 두 개가 맞물린 건지.... 어쨌든 나는 주변에 영향을 주는 것도, 영향을 받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순간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덤덤하게 지난 길을 걸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내 무던함이 주변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후배나 친구들이 사적인 고민들을 털어놓을 때, 내가 알지 못했던 그들의 고통에 놀라곤 한다. 나와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던 그들이 나처럼 그럭저럭 잘 지낼 거라 생각했다. 미처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는 미안한 감정과 그들에게 나 또한 차가운 세상이라는 걱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의 두 팔은 차갑게 식어버린 그들을 감싸 데워주기엔 한없이 얇고 메말라 곧 바스러질 잎새처럼 느껴졌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가며, 내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역치로 다른 사람들의 역치를 어림짐작하는 안일함을 경계해 왔다. 하지만 나조차도 사는 게 버거워질 때면, 그 안일함이 나태하게 방치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 사람들에게 또 다시 무심하고 차가운 세상의 일부가 되진 않았을까. 이 안일함에 대한 나태와 경계가 반복되어 나는 그 반복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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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마트 창고에서 일하셨다. 각종 술 박스들과 쌀자루들이 쌓여있는,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셨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학교를 마치면 그 창고로 갔고, 쌓여있는 박스와 자루들 속 어느 빈 틈에 조약돌마냥 웅크린 채 일하시는 어머니를 묵묵히 바라봤다. 겉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무덤덤한 그 아이는 창고에 드리워진 그늘처럼 잔뜩 응달진 모습으로 하염없는 시간들을 죽여갔다. 


큼지막하고 공허한 창고를 가득 메운 추위와 더위는 나약한 우리 모녀를 속절없이 압도해 버렸다. 그 압도하는 무참함 속에서 겨울이면 휴대용 히터 한 대, 여름이면 선풍기 한 대에 의지했다. 마트 사장님 가족과 직원들이 밥을 먹고 떠난 자리에서 후다닥 끼니를 해결하며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던 한 노동자와 그의 어린 딸이었다. 


초등학생인 나의 시선에 담긴 어머니의 모습들은 여전히 성인이 된 내  마음을 쿡쿡 찌른다. 마음에 사무쳐버린 감정의 기억들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당시 겨울 속 어머니는 시장에서 산 3만 원도 채 안 되는 검은색 반코트만 10년 내내 입고 다니셨다. 동상으로 얼어붙고 갈라지며 굳어져 버린, 마침내 무자비하게 도려내진 살의 자국들이 크레바스처럼 늘 어머니의 발바닥 깊숙이 자리 잡았다. 여름 속 어머니는 따가운 태양 아래 카라멜처럼 흘러내리는 땀으로 언제나 땀띠를 안고 사셨다. 어머니는 사시사철, 불철주야 일을 하셨다. 그래도 모이지 않는 게 돈이었고, 그럴수록 깊어지고 선명해지는 건 어머니의 크레바스와 땀띠였다. 


꾸역꾸역 삶을 살아내는 어머니를 보며 사무쳐 오는 수많은 서글픔 들을 어머니께 구태여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목울대를 쳐대는 슬픔을 꼴깍꼴깍 삼켜대며 내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경직되어 갔고 그 모든 서글픔 들을 끌어안고 깊은 바닷속으로 홀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누구보다 무던한 아이가 됐다. 주변으로 하여금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혀를 내두를 만큼 감정이 메마른 아이로 여겨졌고, 나 스스로도 나를 그렇게 속여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안 나올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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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머니께서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사회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께 눈길 한번 마음 한 번이 더 가는 게 사실이다. 그 아주머니들을 향해 누군가가 퉁명스러운 언행을 내뱉거나 아주머니들께서 난처한 일들을 겪으시는 걸 보면, 괜히 마음에 심통이 나며 순식간에 슬픔의 멍울이 지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활기차게 안부 인사와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뿐이었다. 


3-4년 전 이른 아침, 다니고 있던 대학교의 한 화장실 입구에서였다. 화장실 앞에서 쪼그려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계신 청소 아주머니 두 분과 마주쳤다. 불청객이 된 거 같은 죄송한 마음이 밀려들어왔다. 그런 마음조차 죄송했기에 흠칫하던 마음을 거두며,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 후 화장실을 들어갔다. 조심스레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에게 한 아주머니께서 맑은 미소와 바나나를 건네주셨다. 그 바나나를 받아 드는 내 손 끝을 타고 죄송함이 전율을 타고 온몸에 쫘악 퍼져나갔다. 그날 내내 책상 위에 놓인 바나나를 볼 때마다 괜히 미워지는 감정들이 회오리처럼 일었다. 

'왜 나는 유난을 떨어 일찍 학교를 온 거지?'

'왜 그분들은 거기서 식사를 하고 계셨던 걸까?'

'그분들을 위한 휴게실이 따로 없는 걸까?' 

그 회오리들은 결국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사무쳐있던 어머니를 향한 슬픔마저 끌어냈다. 

괜한 유난일까 싶어 조심스레 알아보니, 해당 건물 1층에 아주머니들을 위한 휴게실이 있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을 얻었고,  다시 나는 덤덤하게 내 일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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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나.

어린 시절 창고 속에서 일하셨던 어머니를 무심하게 바라봤던 나. 

화장실 앞에서 식사를 하고 계신 아주머니분들을 걱정하다 이내 내 삶으로 돌아간 나. 

다른 시간 속에 살던 세 명의 내가 중첩되어 부끄러움의 공명을 이뤘다. 끝내는 고통을 덤덤하게 구경하고 있는 내가 표면에 떠올랐다. 


범상한 공간, 어두운 공간, 이른 시간... 사회에서 구경조차 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고달픔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당장 나에게는 익숙하기에 그 고통을 심상하게 받아들이고 그저 서로를 구경 아니, 방관하며 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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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안 나올 아이.


그 아이는 온수가 나오지 않아 얼음장 같은 물에 언 손을 연신 담그며 설거지 하는 어머니를 보는 게 슬펐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퇴근하시기 전, 꽁꽁 얼어 찢어지게 아려오는 손을 호호~ 녹여가며  모든 설거지거리들을 없애 버렸다. 


그 아이는 어머니께서 힘들게 버신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외모에 관심이 많을 시기였지만 뻔뻔한 단벌신사/헌 옷신사를 고수했고, 식욕이 왕성한 시기였지만 학교 매점과 문방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100원, 500원 어머니께 받은 용돈들은 홍삼 통에 차곡차곡 모았고, 어버이날 하얀 봉투에 담아 편지와 함께 돌려드렸다. 


그 아이는 바쁜 와중에도 휴일이면 밥을 해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왠지 슬펐고 그 음식들을 먹을 때마다 마음에 멍울이 졌다. 목까지 차오르는 죄송함을 누르기 위해 모든 음식들을 허겁지겁 맛있게 열심히 먹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머니의 손맛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아이는 여전히 어머니께 '엄마 음식이 제~일 그립고 제~일 맛있다'라고 한다. 그 아이는 아침 식사로 어머니와 함께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던 날이면, 배부르다고 달달한 국물이 남겨진 그릇을 어머니 쪽으로 밀었다. 


그 아이는 내 편이 없다고 생각하며 홀로 힘들어하던 순간들을 어머니께 기필코 말하지 않았고, 괜히 어머니를 뒤에서 안으며 아프고 추운 마음을 달래 보려 했다. 어머니께는 꼭 어머니 편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 앞에서 춤과 노래를 하며 재롱을 떨었고,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는 어서 학교나 가라고 밀어대시면서도, 덕분에 엄마가 산다는 말을 하며 활짝 웃으셨다. 


그렇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의 고통을 방관했던 것도 그 고통에 덤덤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어머니를 이루는 하나하나가 나의 마음에 멍울로 졌기에 그 멍울들이 확대경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내'가 크게 보였던 것이다. 감히 어떤 말과 행동으로 어머니의 고달픔을 달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덤덤한 아이가 아닌 덤덤한 체하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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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에 침잠해 있던 아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깊은 바닷속에 내리는 한줄기 햇살을 따라, 아이는 숨 쉬고자 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바다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바다의 표면에서 처음 세상의 햇살을 받았을 때, 그 따스함이 가져다주는 벅찬 행복에 젖었다. 그러다 거친 파도가 밀려올 때면, 그 극명한 차이에 놀라 숨을 헐떡였다. 그렇게 스무 살 초반의 나는 취함과 헐떡임을 반복했다.  


지금의 나는 다시 고통에 덤덤해졌다. 하지만 그 덤덤함은 어린 시절 깊은 바닷속에 침잠해 있던 아이의 덤덤함이 아니다. 수평선과 지평선이 모호해지는 아득한 바닷속에서 파도를 탈 수 있는 덤덤함이다. 잠잠하면 잠잠한 대로 거칠어지면 거칠어지는 대로 다가오는 파도들에 맞게 몸을 넘실대며 나는 인생의 고해를 덤덤하게 항해해 나가고 있다.


오고 가는 파도에 뿌리가 잠겼다가 이내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나무와 식물들처럼, 갑작스러운 파도에 난파된 나룻배 조각들처럼,  속절없이 뒤흔드는 고해 속 비틀거리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그들에게 함께 파도를 타보자고 손을 건네리라. 그들에게 쾌락을 주진 못하지만, 그들의 고통을 알아봐 주고 함께 가보자고 말하는 사람이 되리라. 


설령 평선들의 끝에 다다른다 해도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완벽하게 파도를 타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넘어지면 일으켜줄 존재가 옆에 있다면 우리는 또 일어나 다음의 파도를 탈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고해 속에 내리쬐는 한줄기 햇살과 같은 사람이 되리라. 창고 안 홀로 인생을 살아내던 나의 어머니께도 한줄기 햇살을 내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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