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나무 Apr 20. 2024

비 오는 날의 단상 2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날은 유난히 기분이 차분해지고 사색하기 좋은 날이 된다. 뭐라도 끄적이고 싶어 진다. 수험생처럼 끈덕지게 책상에 앉아 자꾸만 글을 쓰고 싶어 진다. 물론 비 오는 날 빠질 수 없는 쓰디쓴 블랙커피를 홀짝이면서 말이다. 젊은 시절 좋아하던 비는 '우르르 쾅쾅' 쏟아지는 집중호우였다. 세상의 모든 추악함과 불평등함, 썩은 내 창궐하는 온갖 더러움과 비리를 모두 씻어줄 것 같은 호방하고 정의로운 싹쓸이 비를 좋아했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서러움과 불평등을 감수해야 하는 내 처지에 대한 울분을 비가 씻겨주는 것 같아 좋았다. 한 번 크게 아프고 나서는 외려 어마 무시하게 쏟아지는 비는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이 가라앉아 기분까지 울적해지기 때문이다. 생을 행한 열정도 욕망도 갈망도 어느 정도 내려놓게 되면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비는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삭히거나 식힐 삶에 대한 온도도 열정도 없는데 비마저 내리면 을씨년스러울 만큼 추워진다. 그래서 한동안 비가 오는 궂은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 봄에 비가 자주 내리면서 비의 또 다른 일면을 발견했다. 바로 비의 잔망스러움과 발랄함이다. 한때 엄청나게 좋아했던 집중호우는 좋아하지 않게 됐지만 비마저 싫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보슬보슬, 부슬부슬,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경쾌함과 발랄함이 숨어 있다. 창문을 두들기며 귓가로 스며드는 빗소리는 잔망스러움이 녹아있다. 귓가를 간질이며 장난질하는 것 같다. 맑은 날보다 이런 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진다. 비가 오면 부득이 나가야 할 일이 없는 한 외출하지 않고 집에 머물며 창밖을 통해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변화가 생겼다. 비가 오면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나간다. 물론 튼실한 우산 하나는 장착하고 말이다. 보도 볼록 틈새로 치솟은 물웅덩이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굵고 기다란 지렁이가 꿈틀거리기도 한다. 게다가 길마저 미끄러워 방심했다간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바지 단도 비에 젖고 심하면 운동화마저 비에 젖어 축축해지지만 신기하게도 맑은 날과 달리 비 오는 날 산책은 또 다른 감성을 느끼게 한다.       




일상이 늘 해맑고 뽀송뽀송하기만 하다면 햇살 고운 날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을 것이다. 물론 비 오는 날도 좋다. 운치 있고 사색할 수 있고 차분해지는 비 오는 날도 좋다. 인적 드문 비 오는 날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삶이란 생각하는 방향으로 스며든다고 했던가? 내 삶은 정확히 그랬다.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적 없었다. 한때 그렇게 살고자 했기에 그 방향으로 삶이 흘러갔다. 물론 이루어진 속도는 매우 더디고 지루했다.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살아 있다는 건 꿈꾸는 게 아닐까. 그게 무엇이건 꿈꾸고 바라고 원하다 보면 언젠가 삶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생각이 스며들어 삶에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는 그랬다. 자신의 삶은 우연이 빚어낸 결과일 뿐 자신은 계획하지도 꿈꾼 적도 없다고. 그래서 꿈꾸는 걸 믿지 않는다고. 꿈꾸다 좌절하면 더 깊은 수렁과 절망에 빠질 뿐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삶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삶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은 걸 이루어낸 적은 없었다. 꿈꿨고 염원했고 바랬기 때문에 삶 속에 스며들어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되었다. 그렇게 삶이 흘러갔다.




생각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비록 헛꿈이라도 소망하고 바란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삶에 스며들어 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마치 내가 시크릿 교주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그저 원하기만 한다고 꿈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절박하고 절실하면 행동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내재된 힘 ㅡ 흔히 젖 먹던 힘이라 표현하지만 ㅡ 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얼마나 강력하게 꿈꾸는지, 얼마나 절실하게 염원하는지가 중요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걷고 있는 내게 묻는다. "꿈꾸는 것이 있니? 생각이 삶에 스며들어 흘러갈 만큼 절박하고 절실한 것이니?"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삶은 생각하고 꿈꾸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비가 대지에 스며들듯이 꿈이, 생각이 삶에 스며들 것이다. '후드둑 툭툭' 내리는 발랄하고 경쾌한 빗속을 조금 더 걷고 싶다. 대지에 비가 스며들어 촉촉해지듯 꿈꾸는 모든 이의 삶 속에 꿈이 스며들어 변화가 나타나길 바란다.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길, 그래서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길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잔인한 3월 소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