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 페인팅의 즐거움
오랫동안 글쓰기에 소홀했다. 예전 직장생활 할 때 직장 상사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동료나 거래처 임원을 만날 때면 "그동안 격조했습니다."라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보았었다. 그 말이 격조있게 들렸다. 그야말로 한동안 글쓰기에 격조했다.
글쓰기에 소원했던 동안 쓰기 대신 그리기를 열심히 했다. 창작한 그림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그림이나 중국화가들의 작품을 아이패드로 베껴 그렸다. 베껴 그리기는 의외로 마음 가다듬기에 아주 좋은 방법임을 알았다. 예전에 유화를 그릴 때는 마음 속 광기가 폭발하는 느낌을 자주 받았었는데, 아이패드로 베껴 그리기를 하는 동안에는 마치 명상하는 것 같은 차분함을 느꼈다.
베껴 그리다 보면 화가들이 붓을 어떤 압력으로 사용했는지, 먹색을 어떻게 조절하여 입체감을 살렸는지 잘 볼 수 있다. 때론 붓끝에 진한 먹을 묻혀 선의 굵기를 일정하게 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붓에 먹을 듬뿍 찍어 붓의 흐름에 강약을 주며 가는 선과 굵은 선을 시시때때로 변화시키며 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붓면을 사용하여 선 없이 면으로만 입체감을 주기도 한다. 선없이 그리는 몰골법은 도저히 베껴 그리기를 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수련이 없이는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몰골법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심사정 어른이 아닌가 싶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나라 화가이지만 애플 펜슬로는 도저히 그의 몰골기법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는 어려웠다.
조선시대의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베껴 그렸지만,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은 제법 많이 그렸다. 그림을 베껴 그리다 보면 그림을 속속들이 보게 된다. 눈으로만 볼 때는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그리다 보면 보인다. 며칠 전 김홍도의 풍속화 <나들이>를 베껴 그릴 때였다. 그림을 그리다 하마터면 울뻔했다. 평소 이 그림을 볼 때면 마냥 행복해 보이는 일가족과 그들을 훔쳐보는 선비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리는 도중에 말잡이 소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을 다 그렸다 싶어 채색을 하려는 순간 그리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 앞의 가족이 탄 소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소년의 발이었다. 그런데 맨발이었다. 세상에! 목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말탄 선비는 아마도 소년의 주인일 터. 그런데 종에게 짚신 한켤레도 사주지 않았단 말인가. 앞에 미소를 띄며 소타고 지나가는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에 대비하여 소년은 주인도, 옆의 일가족의 모습도 보지 않고 말에만 눈길을 주고 있다. 희극 속에 감춰진 비극을 캐치하는 순간이었다.
신윤복의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면 조선의 힙스터들이 보인다. 남자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묘사한 화가가 또 있을까! 나는 그가 그린 그림 속의 한 인물들만 클로즈업해서 그려 보았다. 그리고 보니 이만저만 멋진 모습이 아니었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한마디로 놀 줄 아는 당시 힙스터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질펀한 놀음을 그린 그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림 속의 인물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다. 독립적으로 그려놓고 보면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아무래도 남편이 음악인이니 그림 속 악사들이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놀이에는 어디를 가든 삼현육각의 악대가 있다. 그림에서 그들만 떼어내서 그려도 하나의 완결된 그림이 된다. 악사들을 그릴 때는 기왕이면 악기를 제대로 그리고 싶어진다. 방법을 모색하다 발견했다. 요즘 한국의 국립 미술관들은 AI로 유물을 그린 그림을 제공한다. 나는 고궁박물관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우리나라 전통 악기의 AI그림을 내려 받아 선을 베껴 그린 후 악기의 실물 사진들을 보며 채색을 해놓았다. 악기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그림이 되지만 나는 이렇게 미리 제작해 놓은 악기 그림들을 실제 화가들의 그림에 편집하여 붙여 넣어 그림을 완성시키기도 한다. 조선의 그림 속에 사실적인 악기 그림을 조합하면 또 하나의 매력적인 창작물이 된다.
나는 그림 그리는 스킬을 향상시키고 싶은 욕심도 있다. 그러나 아이패드 페이팅을 하면서는 스킬 향상 보다는 편집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베껴 그려서 만들어 놓은 나만의 데이터 베이스를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편집하여 또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다. 2년전 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약 400여점의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더 그려 데이터베이스를 늘려갈 계획이다.
요즘엔 신선도와 상상 속의 길상 동물들에 눈이 가서 그리고 있다. 신선도를 포함한 도석인물화를 그릴 때나 용, 기린, 봉황, 해치 등 상상 속의 길상 동물들을 그리다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예전에는 도석화들을 보면 왜 이런 것을 그렸는지 의아해 했는데, 그리다 보니 무언가 마음에 신비감이 돌면서 기운이 생성되는 것 같다. 그리고 갈피가 잡힌다. 왜 우리 조상님이 도석화를 그리셨는지.
그동안 구글에서 제공하는 AI 그리기 앱에 내가 원하는 그림을 명령하여 결과물을 만들어 보았지만 처음 몇 번 재미있지 양식이 식상해서 마음이 전혀 가질 않았다. 유튜브의 AI를 활용하여 만든 영상이나 그림도 많이 보았지만 처음에 호기심이 가서 보았지 다시 보고 싶지도, 마음이 가지도 않았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내 명령대로 만들어진다 해도 내가 직접 내 손으로 해보는 즐거움에는 비길 것이 없지 싶다. 또 베껴 그리기 하다 보면 정신 수양도 되니 일거양득이다. 단지 몇 달 너무 열심히 그렸더니 시력이 많이 안좋아졌다. 눈도 쉴 겸 생활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다시 글쓰기로 컴백했다.
* 노파심에서 드리는 경고 : 조선시대 그림들을 베껴 그리면서 색, 구도, 내용 등을 변경하거나 편집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절대 공부 자료로 활용하시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