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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인아 Apr 20. 2022

팬의 나라에 타이포그래퍼는 없다(2017)

사랑이 잠식한 공공공간들: 지하철 역사부터 청와대까지

오풍이 본 어제의 풍경 ① → 5년 전 계간 the T 혁신3호(제11호, 2017)에 기고한 원고(미교열 버전)을 업로드합니다. 이 글에는 세 가지 사례가 들어있습니다. 배호 팬클럽이 조성한 삼각지역 '배호 만남의 광장', 아이돌 팬덤에서 제작하고 게재하는 지하철 광고 문화, 정치인 문재인의 팬클럽 '젠틀 재인'. 5년의 시간이 흘러 2022년 대선은 정치인들이 '짤방'용 포즈를 하는 게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치러졌습니다. 중장년층들로 구성된 트로트 가수 팬덤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풍경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함께 사랑하는 마음은 힘이 세서 이 세상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모두를 동시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혁명적으로 바꿔가고 있으니까요. / 편집자 주


1971년 11월, 가수 배호가 29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뜬금없이 그의 이름이 이런저런 지면을 통해 재등장한다. 2001년 ADSL 랜선을 타고 그의 팬클럽이 다음 카페에 둥지를 틀고부터다. 지난 16년간 그들은 배호 모창 연습을 하고, 배호 무덤을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고, 배호 영혼결혼식을 열고, 배호 팬픽을 쓰고, 배호 노래비를 전국 곳곳에 세우고, ‘배호 만남의 광장’을 삼각지 역에 조성하고, 배호가요제를 매년 개최하고, 배호 테마 카페를 운영하고, 그리고 언젠가 배호 박물관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IT 강국이라는 명예를 선사한 ADSL의 보급은 팬덤 문화에도 변곡점이 되었다. 시대의 변화는 세대를 초월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0년대 초반은 이 흐름이 본격화한 시기로 PC 통신 시절부터 온라인 조직력을 키워왔던 아이돌 팬덤이 그 흐름을 주도하고 배호 팬클럽 등 노년층도 온라인을 매개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대중스타가 아닌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노사모’가 출범했고 2004년엔 이를 모델로 한 ‘박사모’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돌입했다. 복제, 증식을 통해 확장해 온 팬덤 문화는 한국 문화 한가운데를 똑바로 가로질러 흐른다. 그리하여 온 국민이 ‘프로듀서’라 불리고 매일 거리에서 팬덤이 송출하는 사랑의 이미지를 마주하며 살아가는 오늘, 그 풍경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오로지 배호 팬들의 성금으로 조성한 삼각지역 내 ‘배호 만남의 광장’(사진 1)은 배호 팬아트의 정수를 보여준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이리 와 어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으라 권하는 기타 치는 금빛 배호 동상과 흰 양복 차림의 실사이즈 배호 그림 입간판. 이 풍경을 완성하는 그 뒤의 대형 그림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삼각지 로터리가 중앙에, 오른편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뒤를 돌아보는 쓸쓸한 남자가, 왼편에는 ‘이것은 무엇인가, 구성주의인가, 추상주의의 어디인가’ 묻게 되는 눈 없는 여성이,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구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가장 눈길을 끄는) 배호의 얼굴, 드럼과 색소폰 연주자들의 실루엣과 기타와 키보드와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로 빈틈없이 꽉 채워 구성되어있다. 이 ‘배호 만남의 광장’을 아이돌 팬덤 문화를 겹쳐 다시 들여다보자.


사진 1. 삼각지역에서 환승하다 우연히 발견한 배호 만남의 광장. 모두 한 번씩 들러 기념사진을 찍는 것을 추천한다. ©신인아


#1 뜬금없이 공공장소에서 사랑을 외친다


어떻게 삼각지 역을 점유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끝없이 물음표가 맺히지만 철저하게 배호 팬의 입장에서만 생각해보자면, 삼각지 역은 배호의 히트곡 ‘돌아가는 삼각지’를 기념하기 안성맞춤인 장소다. 아이돌 팬은 지하철이나 버스 광고판을 엄선 및 구매해 본인이 응원하는 멤버의 생일, 데뷔 기념일, 앨범 발매 등을 알리고 축하한다. (사진 2) 자랑스러운 비빔밥을, 독도를, 타임스퀘어에, 타임스지 광고지면에 게시했듯 ‘사랑하는 ㅇㅇ’을 알리기 위해! 이는 팬의 의무이자 보람이다. (다른 말로 ‘뽕이 차오른다’고 한다.) 배호 팬 역시 ‘배호 만남의 광장’을 조성하고 보람에 찬 박수를 쳤다. 그러나 배호가 얼마나 위대한지와는 별개로 이 광장을 보고 배호 동상과 기념사진을 찍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광장은 팬 광고와 마찬가지로 ‘ㅇㅇ을 알리겠다는’ ‘광고’가 가지는 목표엔 도달하지 못한 채 ‘ㅇㅇ을 사랑하는 나'를 전시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이 광고는 실패함으로써 기능한다. 팬 정체성의 핵심인 ‘팔불출처럼 ㅇㅇ에게 어쩔 수 없이 빠져버린 나’를 확실하게 증명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확인하며 팬으로서의 정체성을 견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팔불출인 나를 인정하고 외부로 전시하는 건 자기 최면의 효과도 있다. 이 과정을 통해 판단력은 흐려지고 대상에 더욱 열렬하게 빠져들 수 있다.


사진 2. © 미디어 노트 https://twitter.com/medianote77/status/814712625963548672


#2 ‘금손’의 지극정성, 오프라인으로 튀어나온 짤방.


금손의 활동이 아이돌 팬덤에서 사진을 공급하는 홈마[1]의 존재로 두드러진다면 배호에겐 서양화가 김수영이 있다. ‘배호 만남의 광장’을 주도적으로 꾸리고 가꾸는 인물로 광장의 그림도 그의 작품이다. 아이돌 팬덤이 추구하는 미감이 김수영이 추구하는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각자 만화나 위인 동상 등 주변 시각 환경에서 요소를 추출, 모방, 조합하다는 점은 상통한다. 이때 추출해오는 시각적 요소들이 애초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으며 작업물은 다시 팬덤 내에서 반복, 재생산, 유통된다. 그렇게 금손의 작업은 온라인 문화를 기반으로 짤방(밈)과 유사한 생명력을 획득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팬 광고는 공공장소라는 장소성과 충돌하며 그 특유의 문화로 재편성된다. 이 문화가 해외 한류 팬덤에까지 전파되어 한류 팬의 의례처럼 여겨지는 것 역시 문화의 고유성을 입증해준다.



#3 얼굴, 무엇보다 얼굴이 중요하다


따라서 타이포그래피는 장식적 성격이 강하다. 아이돌 팬 광고에서 글은 주로 팬덤 내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숫자(기념일), 메시지 혹은 워터마크 역할을 담당한다. 서체는 손글씨 혹은 유행하는 (요즘엔 배달의민족 주아체 풍) 고딕체가 주로 애용되며, 눈에 띄지 않도록, 그래서 얼굴이 더 부각되도록 투명도가 적용되기도, 인물 누끼 컷 뒤의 레이어로 밀려나기도 한다. 따라서 크게 사용된다 하더라도 팬덤 외 행인에겐 그다지 의미 있는 정보 값을 가지지 못한다. 그저 아마추어가 만든 광고라 그렇다 치부하기엔 최근 프로파간다 최지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지하철 광고도 같은 지점을 공유하기에 흥미로웠다.(사진 3) 캘리그래피가 얼굴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배치하고 데뷔를 응원하는 메시지는 오른편 하단에 작게 배치되었다. 오로지 애정만을 담은 훌륭한 디자인! (다만 사진을 투톤 처리한 부분은 일부 팬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얼굴은 중요하기에 총천연색으로, 쨍하게,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배호 만남의 광장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얼굴이 5번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온갖 정성을 들여 변주될 동안, 금색 현판에 쓰인 서체는 무심하게도 굴림체다.(사진 4)

사진 3. 나도 응원해!! © 최지웅 디자이너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BU0tZMdjyZp
사진 4. 무심함의 상징 굴림체 © 신인아

팬덤에서 키워낸 팬덤 문화의 다양한 속성 중 외부에서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천만 원 대의 지하철 광고를, 얼마일지 상상도 안 가는(?) 삼각지역을 점유하는 힘, 즉 이를 가능케 하는 조직력과 돈이었던 듯하다. 2000년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아이돌 팬덤에서 팬레터 대신 고급 외제차나 음향장비 등을 스타에게 선물하기 시작하자 ‘정신 나간 빠순이’들이라며 사람들은 흥분했다. 동시에 일각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라고 주목했다. [2] 그렇게 팬덤 문화를 본떠 만든 것이 ‘노사모’[3], ‘노사모’를 본떠 만든 것이 ‘박사모’다. 이 둘은 조직력은 베껴오되 각자 구성원에 따라 시각적 정체화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최근의 태극기 집회를 떠올려보자. 집회 자체에 비판 지점, 모방의 비윤리성을 따지기 전에 집회를 통해 유통된 이미지는 짤방으로 소비되기에 너무나 적합했다. 맥락 없이 좋아하는 것들로 조합되어버린 우상(박근혜, 태극기(곧 박정희), 성모 마리아, 예수, 십자가)들의 이미지, 그리고 무수한 반복 재생산은 앞서 설명한 온라인 팬덤과 짤방의 생성과정을 그대로 답습한다. 실제로 몇몇 이미지는 짤방처럼 수많은 ‘ㅋ’과 함께 소비되기도 했다.


지난 19대 대통령 대선을 계기로 이 문화는 다시 한번 변곡점을 맞이한 듯하다. 문재인의 팬클럽 ‘젠틀 재인’에는 카페 메인에서 바로 접속할 수 있도록 별도 링크까지 걸려있는 문재인 ‘사진/동영상’ 게시판이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동영상을 2-3초 단위로 짧게 끊어 올리는 gif, 아이돌 홈마 스타일의 사진(사진 5) 팬아트(사진 6) 등이 게시되어 있다. 어휘의 수용도 특히 눈에 띄는데 문재인을 지칭하는 애칭이 ‘예령이’(예비 대통령), ‘이니’(문재'인이'), ‘완댜님’(왕자님) 등으로 변모했고 ‘5959’,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며 ‘부둥부둥’의 메시지가 강해졌다. 대선 전 ‘달님’을 사모하며 등산복을 즐겨 입던 그들이 아이돌 팬덤 문화와 밀착, 복제할 수 있게 된 데는 실제 아이돌 팬덤에서 넘어온 ‘네이티브’의 유입과 동시에 ‘같은 편’이라며 그들을 환영한 혹은 방관한 팬덤 내 다른 지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예상치 못한 조합은 일단 재미있다. 하지만 이번엔 우려가 재미를 앞선다.


초기 아이돌 팬덤을 지칭하는 용어는 ‘오빠’를 사랑하는 ‘소녀팬’ 혹은 ‘빠순이’ 등 외부로부터 붙여진 이름뿐이었다. 오늘날 팬들은 스스로 ‘내 새끼’를 ‘부둥부둥’해주는 ‘할미’라는 호칭을 선택했다. ‘적금을 깨’, ‘우리 애’가 ‘꽃길만 걷고’, ‘하고 싶은 거 다 하’ 길 바라며 인터넷 정서를 기반으로 농담 반 진담 반, 스스로 ‘팔불출’ 정서를 재구축한 것이다. 이 ‘재미’에 이면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무결, 무비판의 존재로 승격된다. ‘젠틀 재인’에 이 문화가 이식되어 올 때 문재인 지지자들이 간과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인을 존경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내 새끼’화하면 어떻게 될까? 어째서 이들이 향하는 길 앞에 박사모가 겹쳐 보이는 걸까? 더 늦기 전에 정신줄을 붙잡고 문재인의 공약이, 정책이, 메시지가 그의 얼굴 앞으로 나서도록 해야 한다. 잠깐, 그럼 팬덤에도 이제 타이포그래피가 제 역할을 할 시점이 도래한 걸까? 아니 그건 탈덕의 길일까?


사진5. © moonlight  / 사진6. '퍼스트독' 마루의 청와대 입성을 축복합니다. © cafe.daum.net/gentlemoon

[1] 홈페이지마스터의 줄임말, 대포카메라로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을 쉼없이 찍는 팬으로 본인이 찍은 사진을 게시하는 사이트를 운영한다. 사진으로 다양한 굿즈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신지후, 아이돌 쫓아 대기업 연봉 버는 ‘홈마’, 한국일보, 2016년 2월 2일 자 (2017년 5월 20일 확인) 

[2] 김현지∙박동숙, ⟨온라인 팬덤(접근성 강화에 따른 팬들의 새로운 즐기기 방식)⟩, 2004, ⟪미디어, 젠더 & 문화⟫, 사단법인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협회. 

[3] “노사모는 팬클럽 방식으로 모임을 꾸리기로 할 때 서태지 팬클럽이 아닌 에쵸티 팬클럽을 모방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일꾼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는데요, 두 팬클럽을 대비해놓고 보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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