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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13. 2023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떠밀리듯 떠나온, 스스로는 가지 않았을 길

내가 찾던 산책로가 사실 등산로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피정의 집 앞에 핀 배롱나무와 성모 마리아 상을 보는 정도로 산보를 만족했을 것이다. 마지막 여름날 새벽, 산책로를 찾다가 마을로 내려가 날파리 떼와 싸우고 돌아왔는데, 뒤늦게 위쪽으로 올라가면 길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온종일 벼르다가 저녁을 먹고 길을 나섰다. 양봉 모자를 쓰니 앞은 뿌옜지만 날파리가 눈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주차장 입구에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 표지판이 보였고, 나는 산으로 뻗어있는 ‘십자가의 길’로 향했다. 그야말로 스스로 자처한 ‘고난’의 시작이었다.     

나무 계단 사이 돋아난 풀은 한 번도 밟힌 적 없는 것처럼 싱싱했다. 여름은 숲의 계절이다. 더운 숨을 먹은 나무는 파도처럼 넘실댔고, 암컷을 찾는 수컷 매미의 울음은 전쟁터처럼 세찼다. 윙윙거리는 모기는 반가운 편이었다. 사람의 흔적이 간절했지만 온 산 가득 침묵뿐이었다. 까마득한 숲 어딘가에서 금방이라도 멧돼지나 뱀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고통의 길이다. 총 14처로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이야기가 담긴 조각품과 기도문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보못했다. 끝까지 갈 용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결국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듯 하산을 택했다. ‘묵주기도의 길’을 우연히 발견해서 잠시 그 길을 따라가다가 그마저 포기하고 서둘러 내려왔다.     

다음 날 점심을 먹는데 A가 ‘십자가의 길’을 가자고 했다. 초입새에서 돌아왔지만 한 번 내디뎌본 길이니 벗이 있다면 갈 수 있지 싶었다. 오후 한 시, 산의 더위는 견딜 만했다. 타는 듯한 태양도 숲을 침범하지는 못했고, 나무가 놓은 그늘막 사이로 하늘이 팔랑거렸다. 산에 오른 사람은 나와 A 뿐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걸으며 간간히 몇 마디 주고 받았지만 서로가 있어 숲의 적막을 견딜 수 있었다. 모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에어컨 없는 방에서 자기 몫의 더위와 싸우고 있을까.

길은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나무 계단이 끝나자 부직포가 깔린 길이 나타났고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이 길이 맞겠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작고 약했다. 너른 정상에 대해 들었으나 보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조형물 앞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요동치는 마음을 누르며 ‘내려가야 하나?’ 고민할 때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이 나타났다.     

햇볕이 강해진다는 건 정상에 가까워졌다는 거다. 잔디밭 위로 광활한 하늘이 펼쳐졌다. 나무가 춤추고 바람은 시원했다. 위로 손을 뻗고 있는 예수 조각상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라고 새겨진 비석은 내가 두 살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오래된 길을 이토록 망설이며 올라왔구나.’ A가 말했다. “걱정하느라 묵상을 하나도 못 했어요.”     

끝을 알고 있으니 내려가는 길은 쉬웠다. 경험은 삶을 안전하게 한다. 달맞이꽃이 정오의 태양 아래서 야위어 가고 있었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이었다. 길고 질긴 밤의 시간을 지날 때 어쩌면 달맞이꽃은 자신이 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새벽 여명 속에서 그제야 아팠던 시간을 곱씹으며 노랗게 벌어진 자신의 모습에 놀랐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꽃은 아침이 오는 만큼 쇠했다. 밤에 피어 낮에 지는 꽃의 운명…. 자기도 모르게 오므라드는 봉오리를 거스를 수 없었다.  

2020년 6월, 교회를 떠났다. 목사는 종교로 차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 차이를 만들었다. 그가 말하는 강자와 약자, 옳고 그름의 기준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독서 모임에서 받은 위로를 교회에서 까먹었다. 떠난다고 했을 때, 온 우주가 말렸다. 머리는 괜찮다고 했지만 가슴이 떨렸다. ‘이래도 되나?’, ‘벌 받지 않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차오르는 미움을 누르고 모르는 척했다. ‘감히 목사와 싸우다니….’라는 비난이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부모님은 “너 후회한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축복’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말로도 내가 나를 설득할 수 없었다.      

떠밀리듯 떠나온, 스스로는 가지 않았을 길이다. 내가 걷지 않고는 몰랐을 마음, 이 길에 베인 분노, 눈물, 한숨, 배신, 떨림을 오롯이 내 것으로 떠안는다. 먼저 간 이들의 발자국이 보인다. 어쩌면 내 영혼이 미끄러진 곳은 나락이 아니라 와락이었을까. 와락 안기고 싶은 그분의 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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