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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슬 May 24. 2024

이혼을 했는데 갓김치가 배달되었습니다.

12. 오 마이 갓김치!

어김없이 야근을 하고 돌아온 집 앞에 생각지도 못한 택배박스 1개가 놓여 있었다.

일반 종이박스가 아닌 아이스박스라 친정엄마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또 무언갈 주문한 듯싶어 의심 없이 집 들고 들어갔다.

냉장식품은 빨리 냉장고 안에 넣어야 하니 가방만 던져 놓고 주방으로 가서 택배를 열었다.

여수 갓김치

보낸 사람은 전남편

보낸다는 말도 없이 떡하니 갓김치를 보낸 것이다.

보내라는 돈은 안 보내고 무슨 갓김치






갓김치를 보고 있자니 재작년 아이와 갔던 여수의 추억이 솔솔 떠올랐다.

파워 J의 성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편 없이, 아빠 없이 단둘이 떠나는 첫 여행이었고 또한 뚜벅이로 다녀야 하니 계획을 아주 촘촘하게 짰다.

여행 가기 전 딸과, 우리의 여행 계획표라며 팸플릿을 만들고 꾸몄다.

여행 가기 전부터 행복했다.


11:19 여수엑스포역 도착

(10분 걸어서)

점심식사(칼국수+해물파전)

(4분 걸어서)

아르떼뮤지엄(2~3시간 소요예정)

(택시 11분 4,200원)

하멜전시관, 하멜등대 사진 찍기

이순신광장에서 저녁식사 &간식

(택시 5,600원)

여수 해상케이블카

(택시, 4,400원)

호텔


이렇게 첫날 계획이 적힌 우리만의 팸플릿이 사라질세라 손에 꽉 쥐고 집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곧 멈추겠지? 제발 멈춰라.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이 한마디 하신다.

이렇게 찔끔찔끔 오지 말고 시원하게 비가 확 내리 뿌야 시원해질 텐데


(여행 간다고 분명 말도 했는데 굳이 이렇게 말씀하셔어야 했나?

저는 비가 멈췄으면 좋겠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아침부터 기차역에서 도넛과 커피를 사 먹으니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벌써부터 풀리는 듯했다.


2시간 남짓 지나니 여수역에 도착했다.

기쁜 마음으로 게이트를 나왔는데 택시기사님의 말을 하늘에서도 들었는지 비가 아주 씨원하게 퍼붓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10분 거리에 있는 칼국수집을 찾았다.

분명 이 길이 맞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비바람에 우산은 뒤집어지고 캐리어는 끌어야겠고, 딸도 챙겨야 하고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엄마! 저기 아니야?

와!

맞다. 드디어 찾았다.

역시 엄마보다 나은 딸! 칼국수집도 잘 찾네.

계획표엔 이동시간이 10분이었지만 30분은 더 걸렸다.



맛집이라더니 역시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비바람을 맞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를 후루룩 입에 넣으니 여기가 바로 파라다이스였다.

오는길이 험난했지만 여수에서의 첫끼는 만족스러웠다.


다음 일정은 아르떼뮤지엄 관람이었다.

이곳은 블로그 협찬으로 가게 되었는데 얼마나 예뻤는지 다음에 친정엄마와 아빠도 꼭 모시고 와야지 생각했다.


다음 일정은 택시를 타고 하멜전시관과 하멜등대를 보러 가는 거였다.

여수 엑스포역 앞에서 택시를 기다렸지만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 잡히지 않았다.

내 앞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분들이 택시를 기다렸고, 1시간 정도 기다렸을 때 비로소 탈 수 있었다.

여수가 이렇게나 택시가 안 잡히는 곳이었나?

박물관이고 뭐고 너무 지친 우리는 호텔로 일정을 변경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춤을 한바탕 췄다.


저녁 먹을 시간.

해산물을 싫어하는 아이덕분에 여수까지 와서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이때도 택시가 안 잡혀서 참 고생했다.

덕분에 지금생각하면 그냥저냥 한 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딸과 나는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2박 3일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계획대로 하지 못한 여행이었지만, 딸이 20살, 30살이 돼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행복한 여행이었음은 분명했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지도 못한 전남편의 갓김치를 보고 있자니,

인생 참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좋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계획에 이혼이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이혼을 통해서 비로소 도전하는 삶을 알아가고 있고, 배움을 통해 한층 더 단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계획대로의 삶도 참 좋겠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고 행복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갓김치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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