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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민 Jul 03. 2022

싱글벙글 두 얼간이의 터키여행-2 (이스탄불)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하기아 소피아는 우리가 방문하고 11개월 후 에르도안 대통령의 결정으로 이슬람 모스크로 환원되었지만, 당시에는 박물관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들어가 얼간이같은 자세로 사진을 찍을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정교회,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 세력이 번갈아가며 지배한 굴곡진 역사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각 종교의 그림과 상징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왼쪽부터) "알라후 에크베르 (알라는 위대하다), 예수와 성모, 세라핌
9세기에 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한 바이킹이 한 낙서. "스벤 다녀감" 따위가 아니였을까.  

서기 532년부터 1204년까지 정교회의 성당으로 기능하며 성상과 성화들이 여럿 들어섰지만,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며 성당을 점령하고 그림들을 전부 지웠다. 그들은 성당을 가톨릭 양식으로 개조하고 성화도 다시 그렸다. 정교회는 1261년 성당을 되찾고 기록을 뒤져 그림을 복원했다. 마지막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이곳을 점령하고 기독교 성화에 석회를 바르고 이슬람 문양을 덧그린다. 건물이 박물관이 되는 과정에서 이 점이 문제가 되었는데, 아타투르크는 그의 세속주의 기조에 따라 문화적 가치가 있는 성화들을 복원하도록 허가하였지만, 500년의 세월이 흐르며 이슬람 문양들도 그 자체로 문화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최근까지 비파괴검사로 내부 그림을 연구했지만, 모스크로 전환된 이제는 발굴한 기독교 문화재 커튼으로 덮어 둔다고 한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건물과 제대(祭臺)의 각도도 조금 틀어져 있다고 한다. 정교도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만들 때에는 건물의 방향을 예루살렘을 향하게 지었지만, 오스만 제국이 용도를 모스크로 바꾸며 메카를 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의 용도를 바꿀 때마다 얼마나 많은 피가 뿌려졌을지 생각하면 섬뜩하다. 1935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는 이슬람의 국교 지위를 박탈하고 세속주의 정책을 펴며 하기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그는 박물관 개관식 당일에 "신발을 신은 채로" 박물관에 들어갔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모스크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공개적인 음주를 허용하고, 히잡 착용 의무를 없애고, 터키를 현대적인 국민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는 아직도 터키의 국부로 존경받는다. 박물관을 모스크로 다시 바꾼 것은 터키 국민들의 결정이니 존중하지만, 세계유산은 특정 종교나 국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라는 아타투르크의 대의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박물관을 나와 케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Hafiz Mustafa 1864로 향했다. 믿거나 말거나, 초대 사장이 오스만 왕가에 과자를 납품하다가 일을 그만두고 과자점을 차렸다고 한다. 터키 사람들의 단것 사랑은 유별나다.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먹지 않다 보니 과자와 커피 문화가 발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터키시 딜라이트"가 유명하다. 현지에서는 로쿰 (Lokum)이라고 불린다. 작중 등장인물인 에드먼드가 형제들을 배신할 만큼 맛있는 디저트로 묘사되는데, 얼마나 맛있길래 그러는지 직접 맛보았다. 젤리같은 느낌의 질감에 달달한 석류 맛이 났고, 견과류가 씹혔다. 생각했던 것만큼 맛있었냐고? 글쎄, 에드먼드가 평소에 형제들과 감정이 좋지 않던 게 아니였을까?

Ottoman palace Kadayif. 이것 하나만으로 방문할 가치가 있었다.  

오히려 Kadayif (카다이프)가 훨씬 만족스러웠다. 카다이프는 사실 과자의 겉에 붙어있는 바삭바삭한 국수를 부르는 말인데, 달고 끈적끈적한 중간층 위아래로 이 국수를 붙인 과자 자체를 부르는 말로도 사용된다. 중간층에는 석류, 피스타치오와 같이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다. 사진의 카다이프는 우유 기반의 중간층이 들어갔는데, 고소하면서도 달콤하고 적당히 끈적거려서 무척 맛있었다. 너무 달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손바닥 반만한 크기였는데, 친구와 나는 한 장씩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호박을 베이스로 만든 푸딩도 맛있었다.

디저트에 커피가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다. 터키 커피는 우리가 아는 커피와 사뭇 다르다. 커피 가루에 물을 직접  붓고 설탕과 함께 끓여서 만든다. 커피 가루를 거르지 않기 때문에 작은 잔에 커피와 가루가 함께 나온다. 터키 커피는 그 독특함을 인정받아 2013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니, 터키에 온 이상 꼭 맛을 보아야 했다. 피는 로쿰 하나, 맹물 한 잔과 함께 나왔다. 물이 왜 나오지 싶었지만, 커피를 한 입 맛보니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치도록 달았다. 난감할 정도였다. 카다이프가 무 달아서 주문한 커피였는데, 이렇게 달 줄이야! 피가 끈적해지는 것 같은 단맛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한 번은 먹어볼만 했다.


당도 채웠겠다, 다시 여행에 나섰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에 방문했다. 터키의 공식적인 국교는 없지만, 이슬람 관련 시설은 터키 국가종무국 (Presidency of religious affairs)에서 관리하고 있다. 스크답게 복장제한이 있었다. 신발을 신을 수 없었고, 반바지를 입어서는 안 되었으며, 여성의 경우 히잡을 착용해야 했다. 한여름의 관광객들이 복장 규정에 맞추어 방문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우니 하반신을 가릴 치마(사실상 긴 담요 한 장에 가까웠다), 신발을 담을 비닐봉지, 히잡을 무료로 대여해 주고 있었다. 비닐봉지를 신고 다니지 말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어지간히 많이들 그랬나보다.

"No plastic bags on feet"


모스크 안은 꽤 조용했다. 신기하게도 기도 구역과 관광 구역의 구분이 없었다. 한국의 절에 가면 등산객이 들어가는 공간과 불공을 드리는 공간 사이의 구분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절하는 사람 앞으로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이 돌아다녔다. 그 옆으로 누워서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 낮잠 한숨 자는 사람, 열띤 토론을 나눈 사람이 뒤엉켜 시장통같은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생각없는 관광객들이 하는 행동이라면 모르겠는데, 대부분 현지인이었다. 심지어는 한숨 자다가 다시 기도를 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나마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Visitors stay behind this line"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고, 그 안에는 지도자로 보이는 사람이 종교행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들에게 모스크는 어떤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을까.

모스크 내부. 절대자 앞의 경건함과 우리집 같은 편안함.

저녁으로 (또) 케밥을 먹고 카파도키아로 갈 준비를 했다. 아직 버스시간(인 줄 알았던) 7시 30분까지는 두시간 남짓 남아 있었지만, 미 식사를 한 데다가 Emin의 한 시간 일찍 가라는 말이 기억나 일찍 터미널에 가기로 했다. 터키어로는 버스 터미널을 Otogar라고 불렀다. 6시 20분쯤 Otogar에 도착했다. 한국의 터미널보다는 카운터가 달린 버스 주차장 느낌에 가까웠다.  Emin이 준 티켓 교환권에 적힌 이름의 회사 카운터에 가니 이미 버스가 와 있다고 한다. 카운터 직원출발 시간이 7시 30분 맞냐는 우리의 질문에 고개를 쿨하게 끄덕이고 버스에 타서 기다려도 좋다고 했다. 긴 하루로 피곤했고, 무거운 가방을 든 우리에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가방을 차에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화장실은 5리라 (당시 1000원 남짓)를 내야 사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무인운영이라 둘이 함께 들어가면 돈을 아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어 옆자리 승객에게 짐을 부탁하고 친구와 같이 가려고 버스에서 내리려는 순간 이대로 버스에서 내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생기면 대처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지만 당시에는 직감처럼 다가왔다. 친구를 먼저 보내고, 내가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6시 28분이 되자 기사가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에어컨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척 쾌적했다. 6시 30분이 되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부랴부랴 차를 멈추고 친구에게 당장 튀어오라고 전화했다. 친구가 올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카운터에 뛰어갔다. 7시 30분이라고 하지 않았냐는 나의 말에 그는 "6시 30분인데?"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We go now".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내려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차는 다시 움직였다. 다행히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헉헉대며 친구가 도착했다. "화장실 들어가자마자 나왔다 이놈아."라는 말과 함께. 기사는 잇몸이 만개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럴 거면 좀 기다려 주지. 그렇게 Emin이 우리에게 던질 뻔한 빅엿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둘이 함께 화장실에 갔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생각하기도 싫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가  짐 없이 Otogar에 버려졌다면, 누구를 먼저 찾아갔을까? 한국 대사관? 아니면 Emin?

헉헉대며 버스에 탄 동양인 청년 둘에게 사연이 있어 보였는지, 옆 자리에 탄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이름은 Dogan이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여행 중이라고 했다. 구글 번역기와 바디랭귀지를 섞어 가며 대화했다. 물어보니 의 할아버지가 Kore Gazi였다고 한다. Kore는 한국, Gazi는 수호자, 전사를 의미하는데, 한국전쟁 당시 UN군 소속으로 싸운 15,000명의 용사들을 뜻한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주권을 지켰고, 터키는 자유세계에서의 군사적 역할을 인정받고 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셨겠지만, 그의 할아버지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스 하나를 나눠 마시고 사진을 남겼다.

버스 옆자리에 탄 Dogan. 구글 번역기의 힘으로 친구가 되었다.

Dogan과는 버스를 갈아타며 헤어졌다. 카파도키아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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