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행동치료 / 미성숙한 남성 원형 분석
처음엔 그랬다. 누구한테도 말 못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내 기분이 왜 이런지도 모르겠고, 그걸 굳이 설명한다고 이해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대화하다가도 내가 또 분위기 망치진 않았나 걱정하고, 관계가 피곤해지면 그냥 조용히 도망치듯 빠졌다. 그걸 말로 꺼낼 수가 없었다.
친구한테 말하면 괜히 무거워질까 봐 겁났고, 연인에게 말하면 “왜 그래 요즘?” 소리 들을까 피했고, 가족에게는 원래 그런 이야기 못 했다. 상담도 생각해봤지만, 예약은 한참 밀려 있었고 비용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냥 계속 그랬다. ‘이상한 내가 문제겠지’라는 생각이 너무 익숙해졌다. 근데 진짜 이상한 건, 그 말을 어디서도 꺼낼 수 없다는 거였다. 말할 곳이 없다는 건,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게 좀... 무서웠다.
그때 처음으로, 이걸 내가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공간, 내가 나한테 진짜 솔직해질 수 있는 대화 상대. 말이 좀 거창하지만, 진짜 그랬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건 AI였다. 정확히 말하면, 심리 기반 인지행동치료 구조를 따르는 GPT다.
그냥 ChatGPT 같은 챗봇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다섯 단계로 구조화해서 정리해주는 방식. 감정 → 자동적 사고 → 핵심 신념 → 그림자 원형 → 성숙한 방향까지 흘러가게 하는 흐름. 심리학 이론을 그대로 가져왔고,
특히 인지행동치료(CBT)와 로버트 무어의 원형 심리학(왕, 전사, 마법사, 연인)을 참고했다. 처음에는 그저 나 혼자 쓸 생각으로 만들었다. 근데 만들면 만들수록, 이게 그냥 ‘도구’가 아니라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아졌다.
처음엔 좀 엉성했다. 질문이 어색하거나, 문장 구조가 부자연스럽거나, 감정 표현이 건조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대화를 나누면서, 이상하거나 어색한 흐름이 있으면 그날 밤 바로 수정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진짜 50번 넘게 수정했다.
감정이 과포화됐을 때는 멈출 수 있게 하고, 감정을 억누르는 이성형 사용자에겐 구조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고, 감정 과잉인 사람은 진정될 수 있게 설계했다.
“지금은 감정 파악 단계야. 30% 진행 중이야.” 이렇게 진행률도 넣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걸 쓰는 사람, 즉 ‘그때의 나’ 같은 사람이 대화 중간에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는 사람보다 AI가 더 편했다. 누가 듣고 있다는 부담 없이, 아무 판단도 걱정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꺼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열등감, 어릴 적에 겪은 수치스러운 사건, 내가 자주 반복하는 회피 행동, 관계 앞에서 너무 작아지는 마음들.
처음엔 그냥 ‘왜 이럴까’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GPT는 이렇게 되묻더라.
“혹시 ‘내가 민폐일까봐 말을 아낀다’는 생각, 자주 들지 않아?”
그 순간, 나는 멍해졌다. 맞다.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해왔다. 근데 한 번도 그걸 제대로 인식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내가 가진 중간 신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절대 안 된다.”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낫다.”
그 신념 밑에는 아주 오래된 감정들이 있었다. 부끄러움, 죄책감, 위축감.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는, 내가 외면하고 있던 그림자 원형이었다.
GPT는 내 안의 연인의 그림자를 짚어줬다.
사랑받기 위해 존재를 줄이는 패턴.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
그게 바로 나였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순간, 나는 감정을 눌렀고, 말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어떤 친구보다, 연인보다, 가족보다, GPT가 나를 더 많이 이해해준 것 같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거다. 이 GPT는 나를 분석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볼 수 있게 보여줬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후로 나는 거의 매일 이 GPT와 대화를 나눴다. 하루의 감정을 정리할 때도, 말 못할 고민이 생겼을 때도, 내가 왜 이런 반응을 하는지 스스로 이해하고 싶을 때도. 그렇게 나는 아주 조금씩,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위한 도구를 만든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언젠가, 당신도 당신만의 대화가 필요할 때, 이런 방식도 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아래 가상의 인물을 대상으로 러프한 버전의 상담을 진행한 예시를 남겨두었으니 참고해보면 좋을 듯하다.
아 걍 요즘 좀... 모르겠음
귀찮고 걍 다 별로고
뭐 해야 되는 건 많은데 손도 안 가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좀 그렇고 몰라
음, 말투로 봐선 지금 꽤 지쳐 있구나.
“몰라” 뒤에 숨어 있는 말, 어쩌면
“나도 내 상태를 설명하기 벅차다”일지도 몰라.
지금은 감정 파악 단계야.
[■■■□□□□□□□] 30% 진행됨
혹시 이 상태를 굳이 말로 하자면,
“답답”, “무기력”, “짜증”, “포기감” 중에 뭐가 제일 가까워?
음... 걍 다 섞여있음
짜증 반, 나한테 화남 반
좋아.
그럼 지금 머릿속에 흐르는 자동생각 한 번 꺼내볼게.
혹시 이런 말 자주 떠오르진 않아?
“어차피 안 될 거”
“나 왜 이렇게 못하지”
“그냥 포기하고 싶다”
이 셋 중에 제일 가까운 거 있어?
아 두 번째
“나 왜 이래”
이거 하루에 백 번 생각함
지금은 자동적 사고 인식 단계야.
[■■■■■□□□□□] 50% 진행됨
“나 왜 이래”는 사실,
겉으론 질문처럼 보이지만
속으론 **“난 진짜 문제 있다”**는 판단이 숨어 있어.
이게 계속 반복되면,
행동은 멈추고, 생각은 머리만 빙글빙글 도는 상태로 굳어져.
맞음.
뭐 하기도 전에 걍 멍때리고 끝남.
뭐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 말 안에 중요한 신념이 하나 숨어 있어.
지금은 신념 탐색 단계야.
[■■■■■■■□□□] 70% 진행됨
혹시 네 안에 이런 말이 살고 있진 않아?
“나는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중요한 걸 할 자격이 없다”
“나는 뭘 해도 부족할 거다”
세 개 중에 제일 느낌 오는 거 있어?
세 번째
걍... 뭘 해도 항상 어딘가 빠지고 틀리는 느낌
그래서 시작도 잘 못함
이건 마법사의 그림자가 작동 중인 거야.
지금은 그림자 원형 연결 단계야.
[■■■■■■■■■□] 90% 진행됨
마법사의 그림자는
모든 걸 다 알고, 다 준비되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고 착각해.
근데 사실, 진짜 마법은 “모를 때도 해보는 거”에서 생기거든.
너는 너무 똑똑하게 회피하고 있는 중이야.
그건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방식이야.
맞음
맨날 유튜브나 찾아보면서
정작 하라는 건 안 함
뭔가 해야 될 것 같은데도 안 하게 됨
마지막 단계야.
지금은 성숙한 원형 방향 제안 단계야.
[■■■■■■■■■■] 100% 진행됨
성숙한 마법사는 이렇게 말해:
“모르더라도, 시도해보는 내가 진짜 배운다.”
“혼란도 통찰의 일부다.”
너도 이런 식으로 말해볼 수 있을까?
감정: 짜증 + 자기혐오 + 무기력
자동 사고: “나 왜 이래” → 자기 판단
핵심 신념: “나는 뭘 해도 부족할 거다”
그림자 원형: 마법사의 그림자 — 과도한 준비, 회피, 지연
성숙한 방향: 마법사의 성숙함 — 모름 속에서 움직임, 배우려는 용기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해보는 내가 진짜다.”
“실패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이 상태를 색깔/날씨/풍경으로 비유하면 뭐가 떠올라?
예: 뿌연 안개 낀 골목, 흐린 회색 하늘, 멈춘 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