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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랏빛인생 Sep 09. 2021

03. 슬기로운 상견례 생활(2)

고생 끝에 욕이 온다


두 번이나 미뤄진 상견례

상견례를 할 때는 불편한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결혼 장소, 결혼 날짜, 예물, 예단 등 결혼과 관련된 대화를 절대 나누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사전에 신랑 신부가 부모님의 의견을 잘 탐색하여 조율을 모두 한 뒤에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견례 전에 신랑 신부들이 미리 해둬야 한다는 그 조율을 마친 우리는 드디어 상견례 이야기를 양가에 드렸다.

결혼식을 B시에서 하니 상견례는 G시에서 하자는 우리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해서 G시에서 상견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거리두기 단계로는 의미가 없자 사적 모임 인원 제한이 생겼다. 우리의 상견례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양가에 인사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5인 이하 사적 모임 금지가 풀리지 않아 기약 없이 미뤄지기만 했다. 참다못한 아버님이 얼른 상견례를 추진하라는 압박을 넣어오실 때 즘 우리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결혼에도 순서가 있다고 말했었던가. 상견례를 하지 않으면 결혼 날짜를 잡을 수 없다. 그러면 식장을 예약할 수 없고, 식장이 없으면 기타 아무 준비도 할 수가 없다. 결국 상견례를 어서 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결혼에 관해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다음번 발표 때는 5인 이하 모임 금지가 완화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상견례 날짜를 정했다.


날짜를 정하는 데도 넘어야 할 고개가 많았다. 일단 주말에도 늘 바쁜 우리 아빠의 일정을 비워야 했고, 주말에도 병원에 출근할 가능성이 높은 그의 여동생의 근무조를 바꿔야 했으며, 무엇이든 귀찮아하는 내 동생을 설득해 그날 꼭 참석하도록 해야 했다.


어렵게 만들어 낸 그날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원 제한은 풀리지 않았고 우리는 또 한 번 모두가 가능한 날짜를 정하는 산을 넘어야 했다.


두 번째 정해진 날에도 거리두기는 완화되지 않았고, 날짜를 세 번째로 조율해야 되는 상황이 오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게 어디 저희 탓인가요


우선, 우리 부모님은 식당에 여러 차례 전화를 해서 부모 따로 신랑 신부와 형제들 따로 앉아 만나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없는지 알아보았다. 그 식당은 G시에서 가장 유명한 상견례 전용 식당이었다. 멀리서 오시는 예비 사돈과 처음 만나는 자리를 격식 있는 곳에서 하고자 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담긴 곳이었다. 격식 있는 식당답게 어떤 식으로도 인원 제한이 풀리기 전까지 절대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책 없이 몇 달째 밀리고 있는 상견례에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우리 사정이었다. 전 세계적 위기 앞에우리의 상견례 정도는 생략해도 될 한낱 의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의 집안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상견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그 노력하지 않는 우리에, 예약 가능한 식당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지 않은 우리 부모님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한참이나 더 지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이다.


어쨌든 그때 당시에는 그의 동생의 병원 스케줄을 계속 바꾸어야 하는 문제와 어머님과 여동생의 헤어, 메이크업, 네일 예약을 계속 미뤄야 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그를 통해 넌지시 전달받았다.


나는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는데, 우선 상견례를 위해 어머님과 여동생이 헤어, 메이크업, 네일까지 풀세팅을 하고 온다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 집에서는 집안 행사 때문에 샵을 가서 메이크업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심지어 결혼 당사자인 나도 상견례를 위해 돈을 들여 어떤 도움을 받을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정책적으로 인원 제한을 둬서 상견례 모임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교육자이신 아버님께서 어찌 그런 억지를 부리는 걸까 황당하기도 했다.


몹시 억울하였지만
대부분의 며느리가 그러하듯
나도 눈치가 보였다.


상견례가 미뤄지는 것이 어찌 내 탓이겠냐만은 여러 사정이 그러하시다니 어떻게든 노력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3일 전에 알려주는 2주 간의 지침을 기다리기를 반복하다, 우리가 사는 C시에서 간신히 상견례는 가능하다는 발표를 듣자마자 식당 대신 그가 아직 채 이사하지도 못한 아파트에서 상견례를 진행하게 되었다.


집에서 상견례를 준비해보셨나요?

3일 뒤부터 모임이 가능한데 딱 그날이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이었다. 그 말인즉슨,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3일 만에 상견례를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뤄진 상견례 때문에 더 이상 책 잡히기 싫었고, 상견례로 인해 양가 어른들이 불편해지는 것은 더 싫었다. 그냥 나 한 명만 총대를 메고 상견례 장을 차리면 될 일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빠르게 결정하고 처리했다. 먼저, 각자의 집에 전화해서 이사 전이라 집과 살림이 협소하고, 급하게 8명이나 앉을 테이블을 구할 수 없으니 부모님과 우리 6명만 상견례를 하자고 통보하였다. 이사 갈 아파트를 부려 부랴 청소하고 그의 짐을 날라 그나마 볼만하게 꾸몄다.


다음날에는 1시간 30분 거리의 대도시로 나가 각종 다과 및 음료, 찻잔, 접시, 티스푼과 포크를 구매했다.  혹여나 상견례를 이리 얼렁뚱땅 치르게 되어 서운하실까 어머니들을 위한 프리지어 꽃도 두 단 사두었다. 저녁에는 미리 찻잔과 접시를 모두 세팅하여 그림이 어떤지 살펴보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골칫거리던 이사가 이렇게 급하게 해결되는구나. 그래도 요리나 꾸미는 걸 좋아하는 내 재능이 쓸모 있게 쓰이는구나. 미리 완성한 상견례장은 꽤 괜찮아 보여서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고생 끝에 욕이 온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나도 내 노력의 끝이 달콤할 줄 알았다. 그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 그날 저녁 상견례장을 꾸미는데 몰입하여 각자 정신이 없던 사이, 그가 방으로 들어가 짐짓 심각하게 전화를 받았다. 한참의 통화 끝에 거실로 나온 그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가슴이 쿵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전화가 오셨다. 동생을 제외하고 상견례를 하자는 통보가 언짢으셨던 거 같다. 이 정도의 이야기를 전달받고 있었을 때 즘, 내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난 참 순진했던 거 같다


어릴 적부터 소심한 그를 답답해하며 남달리 교육하셨던 아버님은 다 자라 서른이 넘은 그에게도 종종 화를 내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라면서 아빠에게 큰 소리 한 번 들은 적 없는 나는 놀랍기만 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런 그의 아버지가 걱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도 뛰어넘을 만큼 그가 좋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지 않는가. 그때는 아무리 엄한 아버님이라도 내가 잘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걱정스런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짐짓 여유 있는 태도로 아버님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부터 아버님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지만 나는 "어머~ 오빠가 왜 그랬대요~~"하는 장난스런 말로 상황을 넘겨보려 했다. 그러자 불같이 화를 내며 돌아오는 말.


"너네 그러는 것 아니다! 상견례 준비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어디 상의도 없이 그런 통보를 하냐!! 갑자기 상견례에 오지 말라고 하면 ㅇㅇ이가 얼마나 속상하겠냐!!! 우리 ㅇㅇ이 서운하게 하지 마라!!!!"


가 주된 내용이었다. 남자 어른의 불같은 사자후를 처음 들어본 나는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너무 억울하고 무서워서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간신히 대답만 하고 통화를 마쳤지만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충격을 받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던데 나는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수만 가지 생각이 휙휙 지나다니며 엉켜버린다. 몇 초안에 내 생각은 '며칠 안에 이사도 안 한 집에서 상견례를 해내라고 하면서 내 어려움은 하나도 헤아리지 않고 자기 딸 마음만 중요하나'에서부터 '사람들에게 결혼을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하지'까지 흘렀다.



아버지의 민낯을 들킨 그는 슬퍼 보였다.


몇 분 안에 그와 헤어졌다 용서하기를 수백 번 반복하던 내 앞에, 부끄럽고 참담한 얼굴을 한 그가 서 있었다. 상견례도 안 한 예비 며느리에게까지 전화해서 고함치는 자기 아버지의 민낯을 들킨, 어찌할 바 모르는 그의 아들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성격이 급하다. 당장 상견례가 내일인데 잘못 없는 그와 싸워 무엇하겠는가. 충격적인 현실은 '한 번만 더 나에게 소리 지르시면 난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협박으로 넣어두고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웃기지만 진짜 테이블 때문에 6명으로 줄여 만나려고 했었다. 치마 입은 여자가 넷이 될 이 모임에 아무리 졸속으로 치르는 상견례라지만 바닥에서 상도 없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집주인이 주고 간 식탁에 내가 가지고 있던 간이 의자를 더해 그래도 나름의 격식을 갖춘 상견례를 하고 싶었다.


지금 와서 그런 푸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닥치면 한다고 그가 친한 동료에게 식탁을 빌려오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다행히 그 동료가 그날 밤 바로 식탁을 빌려줘서 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6명까지 맞춘 티세트와 식기는 어쩔 수 없이 근처 다이소에서 대충 비슷한 것으로 끼워 넣었다.


그날 밤, 나는 많이 울었다.


준비를 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해서 시집을 가야 하나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예비 며느리를 폭력적으로 대할  있는 분이 내일 상견례장에서 우리 부모님께는 어떻게 대할까 걱정도 되었다. 부모님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상견례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10초에  번씩 불뚝였다.



상견례는 어떻게 될 것인가.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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