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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X Jan 19. 2023

간도 쓸개도 없는

“국어는 너무 고민이에요. 등급이 2~3등급을 왔다 갔다 하거든요. 혼자 기출을 풀어도 그렇고 모고도 그렇고 학원 설명회를 국어 때문에 다녔습니다. 제가.”

“국어는 학원 다니기보다 일단 방학에는 혼자 하기로 하고 3월 모의고사 성적 보고 안 나오면 바로 학원 가기로 했습니다. 선생님도 알아봤고, 맘에 드는 분도 골라 놨어요. 교재는 XX를 쓸 생각이고요.”

“영어는 기출은 많이 풀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빈칸 추론 문장 삽입 등 논리력 위주의 문제들을 많이 풀어봐야죠. 교재는 아직 미정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수특 가볍게 보고, 기출도 들고 가겠지만 메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터넷 강의는 안 들어도 교재는 인터넷 강의 선생님 것을 쓸까 고민 중입니다.”


위 글은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서술한 내용이다. 잠깐 글을 읽기를 멈추고 저 말은 과연 누가 한 것일지 한 번 생각해 보라. 고등학생? 재수생? 아마도 나는 당신이 고등학생이나 재수생 등의 수험생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은 고3 수험생이라고 답변하였다.) 혹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면, 당신은 틀렸다.


사실 저것은 고3을 앞둔 자녀를 둔 한 학부모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한 영상에서 어떤 학부모는 다른 예비 고3 학부모들에게 주는 조언, 속칭 ‘꿀팁’이라는 제목을 달고 위와 같은 말들을 하고 있었고, 5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거느린 그녀의 영상 아래는 좋은 정보를 제공해 주어서 감사하다거나 현실적이고 큰 도움이 되는 말씀을 언제나 감사하게 듣고 있다는 따위의 댓글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그런데 왜 많은 이들이 저 글이 학생이 쓴 글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너무 고민이에요’, ‘맘에 드는 분도 골라 놨어요’, ‘메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라는 표현 때문일 것이다. 위 표현에서 등장하는 ‘고민하고 생각하여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것’은 주체적인 행위이며, 학습을 하는 주체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없이 학생이니까. 그렇기에 다들 자연스럽게 저 말을 한 사람도 학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저 영상에 나오는 학부모의 말들이 너무나 이질적이고 불편했다. 해당 영상의 학부모는 자기 자신과 자녀를 전혀 구분하고 있지 못했다. 저 말만 보면 마치 저 학부모는 자녀 대신 수학능력시험을 치러 들어갈 것만 같았다. 고민도, 선택도, 생각도 부모가 대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깝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부모와 자녀는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객체이다. 또한 그 학부모는 미숙한 자녀를 대신한 능숙한 자신의 합리적 판단이 자녀와 본인을 보다 나은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그토록 당당하게 다른 이들에게 ‘꿀팁’이라며 전파했지 않겠는가?  

   

영상을 본 뒤 처음으로 든 감정은 동정과 연민이었다. 동화 속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피노키오가 사랑과 관심 속에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랑과 관심 속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목각인형 피노키오로 자라고 있는 가엾은 아이가 보였다. 슬프게도 그는 과분할 정도의 사랑과 애정,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관심과 격려라는 줄에 메여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게임을 하다가 패배하면 좌절하거나 슬퍼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슬픔을 경험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 게임기를 빼앗아 대신해 버린다면, 아이는 끝끝내 게임을 하는 방법을 익히지도 못하고 게임을 하며 얻는 재미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좋은 것만 해주고 싶고, 실패의 아픔과 실망을 겪지 않게 해주고 싶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힘든 시간을 겪지 않도록 해주고 싶은 부모의 절절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살아가는 방법과, 삶의 재미를 빼앗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결코 자녀의 삶을 부모가 대신 살아 줄 수도 없고, 자녀의 미래를 부모가 설계해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미성년이라 하더라도, 미성숙하다고 하더라도,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모두 어리고 어수룩하더라도, 설령 잘못된 길을 걷고 후회할지언정 타인이 대신 살아주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 타인의 삶을 살아온 아이가 스무 살이 되는 순간 갑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결단하여 살아가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 응원이면 족하다. 부디 자녀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말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상은 자녀를 믿어줘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아이들과 싸우지 말고 간이랑 쓸개는 꺼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입시 끝나면 다시 장착하세요. 아이들 비위도 맞춰주고 얘기도 잘 들어주고, 무엇보다 믿어주자고요.” 간과 쓸개가 모두 빠진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지 모르겠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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