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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06. 2024

아무것도 아니다.

지친다. 그냥저냥 잘 지내다가도, 마치 생리날짜 돌아오듯 주기적으로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아침이면 못다한 일거리를 향해 직장으로 돌아가고, 저녁이면 못다한 책임감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는 삶. 빙글빙글. 없이 같은 곳으로 돌아가고 돌아가는 생활. 멀미가 난다. 한걸음 뗄 때마다 궤도를 이탈해버리고픈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 한다. 아닌 척 한다.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끔은 꼭 벌을 받고 있는 것만 같다. 살면서 품었던 수없이 많은 나쁜 마음들에 대한 벌. 이렇게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나쁜 마음은 또 새롭게 생겨나 형량은 자꾸 늘어만 간다. 받아들여야 한다. 순응해서 살아야 한다. 돌아가고 돌아가고 돌고 돌면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그 속에서 억지기쁨이라도 찾아내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반항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안다. 나도 제발 그러고 싶다. 대체 누구에게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수련을 하면, 이렇게 답답증이 도지지 않고 우울감에 빠지지도 않고 주어진 삶을 착실하게 살아낼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몸은 순응하는데 마음은 터지기 일보직전인 내가 숨이 막힌다.   


스스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일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여전히,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기를, 잠시라도 나를 이곳에서 꺼내주기를 꿈꾸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그런 사람은 없다고 수없이 되뇌이며 그따위 헛된 꿈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얼마전에 다시 보게 되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있던, 여전히 건재한 내 욕망을.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다. 겨우 다섯시간쯤되는. 그 분은 내게 예쁘다고 해주고 맛있는 걸 사주고 웃어주고 들어주고 얘기해주고 아이들과 내 선물까지 챙겨주셨지만, 생각해보면 내게만 그런 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불현듯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기별로 하루만 오늘처럼 저랑 데이트 해주시면 안되나요?'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슬펐다. 비참했다. 왜 아직도 이런 감정이 살아있는지, 왜이렇게 나약해 빠졌는지, 왜이렇게 어리석은지, 울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저분해진 식탁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내게 딸이 물었다. "엄마 왜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부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람과 동시에 제발 어떤 일이든 일어나기를 바란다. 내 안엔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기에, 더 이상 내 탓을 하기도 지치기에, 어떤 일이든 내 안이 아닌, 내 바깥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밖에서 안으로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물러서는 척, 막아보는 척 할 것이다. '안되요! 내게는 아무일도 일어나면 안되요! 나는 이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렇게 벽을 치고 한동안 굳건한 척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더 나를 흔들어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좀 더, 조금만 더 나를 잡아당겨달라고, 도저히 못 이기는 척 끌려갈 수 있게. 제발 여기서 나를 구해달라고.




아니다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강해져야 한다. 한눈을 팔지 못하게 차안대를 하고서 아침저녁으로 내 길을 열심히 오가야 한다. 내 길은 단 두 개다. 아이들(가정)과 일(돈). 외로울 것도 답답할 것도 없다. 우울할 것도 숨막힐 것도 없다. 얼마나 간결한 삶인가. 이 끝없는 원 안에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며 살 수 있다. 그것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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