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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17. 2024

명절

 명절이다. 참 빨리도 돌아오는 명절.

연휴마다 뭘해야 할 지 고민한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뭐든 하나라도 특별한 걸 해줘야 할 것 같고, 엄마한테도 우리 셋이 이렇게 재밌게 보내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다. 이혼 후 벌써 아홉번째 명절인데도 그런 마음의 부담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마음은 아마 형태를 조금씩 바꿔가며 평생 계속될 것이다. 아이들이 크면 또 아이들에게 불쌍해보이지 않게, 혼자있는 엄마를 짐처럼 느끼지 않게 '엄마 이렇게 재밌게 편하게 잘 보내고 있어. 집에 안와도 돼. 엄마 신경쓰지 말고 놀러가!'라고 말할만한 뭔가를 해야 할 것이다.  


 그제는 엄마가 준 돈으로 아이들 옷을 사주러 아울렛에 다녀왔고, 어제는 아이들과 놀이동산에 가서 7시간을 놀고 욕조가 큰 호텔(이지만 모텔같았다)에서 잤다. 그리고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과학관 들러서 한참을 놀다왔다. 그렇게 연휴 3일이 지나갔다. 놀기만 했는데 나는 좀 힘들다. 하지만 명절에 팔자좋게 놀기만 하는 주제에 힘들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혼자 푸념 중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5일을 보내자 마음먹었지만, 사실 즐거울 게 없었다. 박카스를 마셔가며 혼자하는 운전도, 이 더위에 온갖 짐을 이고지고 아이들과 놀이동산을 누비는 일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등등 장소와 상관없이 해야하는 아이들과 관련된 까지. 모두 다 내 '일',  오히려 집이 아니어서 더 힘든 내 '일'이었다. 

아이들이 존재하기 전 모텔과 호텔을 다녔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내가 여자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 지칠대로 지친 애엄마일 뿐 여자도 사람도 아닌 것 같단 생각이 . 밤새도록 호텔방에서 내가 한 일은 대강 이랬다. 아이들이 흘린 치킨부스러기를 줍느라 무릎을 꿇고 물티슈로 바닥닦기, 아이들이 정신없이 노느라 엉망이 된 방과 욕실 정리, 혹여 애들 감기라도 걸릴까 침대에서 떨어질까 수시로 깨서 아이들 자세와 이불을 확인하고 에어컨 온도와 풍향 조절하기, 쉬하고 싶다는 애 화장실 데려가주기, 다리아프다는 애 다리 주물러주기 등등..


그러고도 집에 와서는 쌌던 짐을 다시 풀어 정리하고, 하루만에 수북이 쌓인 빨래거리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밖에서 계속 얄궂은 것만 사먹였다는 죄책감에 더 신경써서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거실,부엌,이방,저방 청소를 하고. 정말이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에너지를 충전한 아이들은 심심하다고 징징대서 해질녁엔 또 놀이터도 가고 킥보드도 타며 놀다왔다. 땀범벅이 된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10시가 넘어도 안자려는 아이들을 기어이 화를 내며 재우고... 하루, 아니 3일이 너무도 길었다.


 혼자 있고 싶다 혼자. 지금 누군가 내게, 아이들과 함께하는 최고급 5성급 호텔과 혼자 묵는 싸구려 러브모텔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면 천천히 혼자 씻고, 젖은 머리를 충분히 말리고, 배고프면 컵라면이나 하나 먹고,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 틀어놓고 그냥 스르르 잠들 수 있을 테니까. 다음날 아침밥 걱정없이 자고 싶은만큼 자면 될 테니까.


아이들이 어릴때도, 이만큼 큰 지금도 나는 늘 좀 벅차다. 아이들 자체도 그렇고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생겨나는 내 과업들도 그렇다. 어느 하나 기꺼워하지 못하고 겨우겨우 한다. 진짜 겨우 겨우...  그래서 이렇게 애들이랑 있는 게 버거울 때면, 이렇게도 혼자있고 싶을 때면, 내가 진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자식이니까 사랑하지 않는다고 뭐해서, 당연히 사랑한다해야 마땅한 존재라서, 혹은 미안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사실은 귀찮고 감당하기 어렵고 밉기도 하고 늘 혼자있고 싶으면서 말이다. 아니다. 래도 사랑하는 것 같긴 한데. 아니 잘 모르겠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자꾸 이런 말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런 게 무슨 사랑이야. 그런 게 무슨 엄마야.'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문다.


내일은 추석당일이라 엄마집에 간다. 엄마랑 언니, 조카주려고 작은 선물도 사놨고 5만원권도 여러장 찾아놨다. 오후에 갔다가 저녁먹고 오면 될 거다. 별 것도 아닌데, 엄마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명절에 엄마집 가기'는 왜 이렇게 하기 싫은 숙제 같은지 모르겠다. 사실은 엄마집에 가기 싫어서 아이들이랑 4박5일 일본여행을 예약하고 담당자와 통화까지 했다가 경비가 너무 얼토당토 않게 비싼 것 같아 관뒀다. 나도 내가 왜이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집에도 너무 가기 싫다. 그래도 어쨌든  티내지 않고 잘 있다가 와야지. 언니한테는 더운데 음식하느라 고생했제 얘기도 꼭 하고, 많이 웃고. 말도 많이 하고. 즐겁게. 어쨌든 명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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