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긁힌 마음에 손 내밀어 주는 마음
사람은 왜 머리를 맞으면 유독 기분이 나쁠까?
정수리에 모욕감 버튼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다니던 피아노학원에서 원장은 툭하면 머리를 때렸다. 볼펜으로 이마를 딱딱. 아니면 하농(두꺼운 피아노 연습용 책)으로 정수리를 내리쳤다. 나는 피아노를 직접 치는 것보다는 이론 공부를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는데, 그것에 대해 칭찬 받은 기억은 없다. 왜냐면 정수리를 통한 폭력이 내게 더 깊이 각인되었으니까. 다른 건 다 날아갔다.
체벌이 있던 시대를 타고 자랐다. 수학문제를 풀지 못하면 맞고, 치마 길이가 기준에 맞지 않으면 맞고, 말대꾸를 해서 맞고, 미대입시반 시절에는 특히 그날 그린 그림에 매겨진 점수가 그 전 날 매겨진 점수보다 1점이라도 떨어지면 맞았다. 이후로도 공교육, 사교육 가릴 것 없이 많이 맞으며 컸지만 유독 머리를 맞은 날들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몽둥이로 엉덩이를, 자로 손등을 맞았던 수많은 날들보다, 이를테면 담임선생님에게 출석부로 정수리를 후려맞은 한 번이 더 강렬하다.
성인이 되어 정수리를 통한 모욕감이 옅어질 때쯤, 고걸 잊을 새라 강력한 한 방을 또 맞게 되었다.
때는 지난 겨울, 한 집회현장에서였다.
2024년 12월 3일 비상식적인 계엄 선포가 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답답함, 불안함이 나를 집어삼켰지만 계엄을 몸으로 막은 시민들에게 빚졌다 생각했다. 그렇게 빚진 마음을 동력삼아 주말에 시간이 나면 집회를 나갔다.
처음에는 작은 티라이트를 손바닥 중앙에 놓고 손을 오므렸다. 빛은 거의 나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목청껏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틈에서, 어쩐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정확히는 뻐끔뻐끔 립싱크를 하며 걸었다. 그 정도가 나의 용기였다.
여러 사람들의 행동에도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갔고 나의 무력감도 커져만 갔다. 각자의 일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는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노력들이 어쩐지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 있는 것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걷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나았다. 적어도 나와 방향이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하는 일이 내게 필요했다. 내가 집회에 나가는 일은 대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실은 내 마음을 위한 것이었다.
하루는 길을 잘못 들어서 반대편, 일명 '태극기집회'쪽에 섞여들어갔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에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인파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딱!
누군가 내 정수리를 태극기로 때리며 외쳤다.
"정신차려! "
태극기를 든 노년의 어른들이 나를 쳐다보며 무어라 험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프기보다는 정수리를 통해 어떤 모욕감이 다이렉트로 내 안에 흘러들어온 느낌이었다. 순간 어버버, 상황파악을 해보려 하는데 누군가가 나와 태극기부대 사이로 팔을 쭉 뻗었다.
"이 쪽으로 와요."
중년 여성분들의 다정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였다. 나는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응하지 마요. 이 쪽 길로 쭉 가면 돼요. 같이 가줄게요."
나는 대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그들과 함께 갔다. 무사히 원하던 곳에 도착한 뒤로는 자연스럽게 헤어졌고 각자의 투쟁을 했다.
조금만 견디면 다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마음은 한없이 약해지고 혹시나하는 불안이 파도처럼 내 눈 앞까지 다가왔지만, 이상하게도 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모욕과 수치의 버튼을 누르는 것도 사람이고, 그 긁힌 마음에 손 내밀어 주는 것도 언제나 사람이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이름 모를 사람들과도 안전하게 같이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배웠다. 추운 곳에서 목이 쉬도록 외치는 동료들이 그 곳에 '있다'. 나는 티라이트 대신 작업용 랜턴에 쓰다 남은 봉투를 둘러 횃불을 만들어 팔을 뻗어 높이 치켜들었고, 우리 집 고양이 얼굴에 글자를 합성해 피켓을 만들어 목에 걸었다. 그리고 집회에 나가 적어도 이 단어는 큰 소리로 외쳤다.
"투쟁!"
내가 변화하는 것도, 세상이 변화하는 것도, 모두 함께라서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