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리셋버튼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의 다정이 되어 준다면-1

by sliiky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한국사회에 절여진 내게는 '평균, 보통'이란 키워드가 코어에 저장되어 있는 느낌이다. 번듯함과는 멀찍이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때면, 나의 어떤 유별함이 모종의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 거 아니냐고 스스로를 어딘가에 묶어두고 질책하고 싶어진다. 그냥 철없는 것 아니냐고. 정신 차리라고. 이대로는 안된다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단단해지기는커녕 문드러졌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너는 회사를 안 다녀 봐서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무례한 충고를 해 올 때도 안 다녀 본 건 사실이라 별 말을 하지 못했고, 친구 결혼식에서 만난 지인들이 모두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의 초품아 시세와 대기업 출근의 고충, 7세고시와 영어유치원의 효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때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삶의 궤적이 달라진 친구들 중엔 모든 선택의 기준이 나와는 달라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은 나를 보고 아직까지 작업을 하고 있다니 대단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내가 자랑스럽지 않았다. 나만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이 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뭔가가 '되어 있거나',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지 않나? 회사에 들어갔다면 과장 정도는 되었을 나이가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는 직급이 없다. 내게는 전시이력과, 쌓인 작업들, 언젠가 쓸 것 같아 모아둔 미술재료들만 있다. 잔고는 비어있고 빚만 잔치다. 학창 시절엔 공부도 그림도 그럭저럭 잘했는데, 이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작업을 포기하기엔 다른 할 줄 아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다고 붓을 당장 들기엔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다. 이제 와서 취업준비를 하기엔 너무 막막해서 망망대해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고, 그렇다고 경제활동을 포기하기엔 내가 너무 구제불능 같았다. 다 늦어버렸다고만 생각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드는데, 나는 여전히 출산과 육아에 확신도 자신도 없다. 몸뚱이는 결정을 유예한 채로 허약해져 간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엔 내 상황이 충분치 않다고 느낀다. 그건 내면이 단단한 사람들, 심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잘 해낼 수 있는 일이고, 그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 하나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가?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좋은 언니가 되지 못했고, 영원히 내 편일 줄 알았던 엄마도 나를 떠났는데, 이런 내가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를 딩크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 혹시 반려인과의 관계가 서서히 엉망이 되어버릴까 봐, 아니면 나중에 지독하게 후회하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내 인생에도 굴곡이 있었고 그 마디마디마다 눈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최악의 불행을 맞닥뜨린 것도, 지독한 가난을 마주한 것도, 엄청난 상실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핍이 좀 있긴 해도 그럭저럭 먹고살고 그다지 문제 될 것 없는 일상. 그런데도 악귀에 사로잡힌 듯 멈춰있는 내가, 그렇기에 더욱, 용서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내 안에 썩은 뿌리가 되었다.



모든 일에 내가 못할 이유만 붙었다.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뭔가를 '하는' 순간 실망시킬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최악을 막는 최선의 방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멀뚱멀뚱, 생산적인 활동은 하지 않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 와중에 다른 사람들에겐 멋지고 그럴듯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조금도 미움받기 싫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모두가 나를 미워할 것 같았다. 나는 보잘것없고, 그렇다고 선하지도 않았고,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었다.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지독한 열패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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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하루는 망한 것 같았다.

내일도 모레도 망할 테니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지금의 나로는 틀렸으니까, 게임처럼 리셋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리셋할 수 없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는 내게 반드시 실망을 했다.



리셋도 불가능, 모두에게 미움 안 받기도 불가능.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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